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첨 (문단 편집) == 평가 == >제갈첨은 글과 그림에 능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촉인들이 제갈량을 그리워하니 모두 그의 재주와 총명함을 사랑했다. __'''매번 조정에 선정(善政)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비록 제갈첨이 제안한 일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서로 전하며 말하길, ‘갈후(葛侯)가 한 일이다’고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칭찬이 그 실제를 넘어섰다.'''__ -『촉서』 「제갈첨전」 >“비록 제갈첨의 지혜가 위급함을 구원하기에는 부족했고 그 용맹이 적과 맞서기엔 부족했으나, __'''밖으론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안으론 부친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충효가 여기에 있었다.'''__” -『촉서』 「제갈첨전」에 기재된 간보[* [[동진]]시대의 인물이다.]의 제갈첨에 대한 평. >제갈량의 아들 첨은 자가 사원인데, 면죽의 싸움에서 등애의 심부름꾼을 베어 죽이고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 37세였다. 또 아들 상은 "부자가 나라의 후중한 은혜를 받고서 능히 황호를 베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탄식하고, 이에 위나라 군사에게 달려가서 죽었다. 첨과 상은 자질이 비록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역시 공명의 충효가법에서부터 온 것이 있었던 것이다.-[[안정복]]의 『상헌수필』 >"제갈첨(諸葛瞻)은 음평(陰平)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하여 면죽(綿竹)에서 죽었다. __'''그가 아비의 충성은 있었지만 그 아비의 재주가 없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죽고 집안이 망했을 뿐더러 나라에도 이익이 없었던 것이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군사를 해산시키고 적에게 항복한 강유의 무리에 비교하면 또한 사람의 마음을 약간 격동시켰다.'''__ 그가 황호(黃皓)를 죽이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도 죽음에 임해서 격분하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을 가지고 죄목을 삼는다면 그에게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니, 이것은 ‘군자(君子)는 사람과 더불어 착함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홍대용]]의 『담헌서』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恪)은 비록 일이 잘못되어 적신(賊臣)에게 살해를 당했으나, __'''그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제갈첨(諸葛瞻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의 부자와 더불어 거센 물결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지주(砥柱) 같았다.'''__ 어찌 집안에서 이런 충성과 절개가 이처럼 한꺼번에 났을까? 추측컨대, 그 부조(父祖)들의 교양에 따라 그렇게 되었던 것인 듯하다. 탄복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 -[[이익(실학자)|이익]]의 『경사문』 >소열제는 어려서 진원방(陳元方 진기(陳紀))과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예절을 익힌 터라 충분히 자신을 굽힐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마침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의 보좌 제갈 무후(諸葛武侯)를 얻었고, 자신은 탕왕(湯王)ㆍ문왕(文王)과 나란히 칭해지게 된 것이다. 한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주(周)나라 선왕(宣王)과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 비견되며,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영예로움이 있었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은 종묘에서 곡하다 죽었고 __'''제갈첨(諸葛瞻), 제갈상(諸葛尙) 부자는 면죽(綿竹)에서 전사하였으니'''__, 이들의 순국(殉國)은 모두 그의 유업(遺業)인 것이다. 각정(卻正)은 후주(後主)를 따라 낙양(洛陽)으로 들어가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유선(劉禪)이 어찌하여 이런 충신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선제(先帝)가 특별하게 대우해 준 것을 추념하여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성대중의 『청성잡기』 고금을 막론하고 제갈첨에 대한 평가는 지혜와 재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지만 충성심은 아비 못지않다는 것이다. 면죽 전투에서 등애는 이행 권한도 없고 의지 여부도 불명이지만 투항하면 제갈첨에게 낭야왕으로 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제갈첨이 기회주의자인 장서, 마막같은 부류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받아들였겠지만 제갈첨은 사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응답하고 등애군을 한 차례 박살내면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이를 보아 충성심 하나는 확실했던 것 같다. 당시 등충은 이미 후작위를 달고 있는데다가 나이와 경력은 등애를 따라서 만만찮았지 않았고 사마 사찬 또한 최소한의 전투 경험을 겸비했을텐데 한 번도 전투를 지휘해보지 못한 제갈첨에게 불리함을 겪다못해 퇴각해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등애에게 자포자기로 하소연한 것을 보면 제갈첨은 군사적으로 경험이 한번도 없었음에도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등애군이 험준한 음평 산길을 넘어와서 많이 상했지만 제갈첨 역시 급조한 전력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진수는 밖에서는 강유, 안에서는 황호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동궐과 더불어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지만 강유 탄핵건에서 볼 수 있듯이 놀고먹으며 산 건 아니었고 병권 교체라는 초강수를 통해 최소한 강유만큼은 제어하려 했다는 점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이동기』, 『학경 속후한서』에서 검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갈첨은 다른 공신 2세인 [[제갈각]]이나 [[사마소]], [[사마사]] 형제와 달리 불과 8살에 제갈량이 별세함으로 별다른 가르침이나 경험을 전수하지 못했다. 제갈량도 이를 염려해 계자서를 남기긴 했지만 [[제갈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갈첨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제갈량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제갈첨의 행보도 분명 많이 달라졌을 공산이 크다. 또 겨우 34살에 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258년부터 조정에 관여하기 시작해 불과 5년후에 나라가 망했다. 뭘 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거기에 강유-염우 교체책에 대한 해석이 맞다는 가정하에 제갈첨의 정치적 능력은 나이에 비해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죽었을 무렵의 나이는 37세. 중앙 조정에서 일한지 불과 5년이었다는 점에서 너무 늦게 태어났고 나라가 너무 일찍 망해서 자질을 보이지도 키우지도 못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을 먹칠할 정도로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 인물평에 상당히 깐깐한 편인 [[홍대용]]조차도 제갈첨 부자가 황호를 죽이지 못한 것을 두고 죄를 물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제갈첨은 황숭의 간언을 듣지 않고 등애의 평지 진입을 허용하는 실책을 범했고 이 때문에 자신과 부하들 모두 전사했다. 그러나 충성심만큼은 [[제갈량]]과 함께 묶여 칭송받을 정도로 흠 잡을 구석이 없었으며 허무하게 배신한 장서와 마막과 달리 등애의 공격을 한 번 격퇴시켜 촉한의 마지막 관문을 허무하게 넘겨주진 않았다. 검각에 들어가기 직전 종회는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장완의 아들 [[장빈]]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와 촉에는 재능과 지혜가 있는 문인과 무인이 많은데, 그대와 제갈사원(諸葛思遠:제갈첨)에 이르러서는 초목에 비유되며, 나와 똑같은 천지의 기(氣)를 받았습니다. 옛 선인에 대한 존경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시했던 일입니다. 서쪽에 도착하면 , 그대 부친의 산소를 차아가 받들어 인사하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경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선친의 산소 위치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종회가 [[조조]] 시대부터 조정의 최고 원로급이었던 [[종요]]의 아들로서 당시 이미 일류 명사였음을 감안하면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그리 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종회는 제갈첨뿐만 아니라 강유를 비롯한 촉 인물들을 우대했으며, [[혜강]]을 모함할 때 [[제갈량|와룡드립]]을 치는 등 과장된 평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 다만 종회의 와룡드립은 진심으로 혜강이 제갈량같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마씨의 숙적인 제갈량과 비유함으로 사마소에게 혜강을 죽이도록 종용한 것이다. 장완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와는 의도에서부터 매우 다르다. 또 종회 본인도 제갈량의 사당에 굳이 제사를 지낸다던지 본인을 스스로 유비에 비한다던지 하는식으로 촉한 인물들을 다분히 의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이 당시 종회는 사마소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촉한을 멸망시킨다면 촉한의 장수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본심과는 관계없이 촉한의 명사들을 비롯한 촉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중받고 아낌을 받았던 장완과 제갈첨을 높게 평가하는 식으로 편승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