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경공(23대) (문단 편집) === 안(鞌) 전투 === 제경공 8년(기원전 591년),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는 패배하여 공자 강(強)을 볼모로 보내 진(晉)나라는 물러났다. 제경공 10년(기원전 589년) 봄, 제경공은 [[노나라]]와 [[위나라|위(衛)나라]]를 쳤다. 노나라는 진(晉)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진 경공은 극극을 중군장으로 [[사섭(춘추시대)|사섭(士燮)]][*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섭]](士燮)과는 [[동명이인|다른 인물]]이다.]을 상군장으로, [[난서|난서(欒書)]]를 하군장(下軍將)으로 삼아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6월 6일 미계산에서 교전이 일어났고, 6월 17일 양군은 안 땅에 진을 쳤다. 그때 제나라 측에는 방추보(逄醜父)가 제경공의 거우[* 車右. 전차를 옆에서 호위하는 직책.]로 있었는데, 전쟁에 앞서 제경공이 호기롭게 외쳤다. "진나라 놈들을 (어서) 무찌르고 밥이나 먹자!" 그 결과 극극에게 화살을 쏘아 맞추는 전공을 세운다. 극극은 다리에 피가 났고 퇴각마저 생각했으나 거어인 해장의 만류로 실행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부상을 견디며 참은 보람이 있었는지 재차 맞붙을 때는 도리어 제나라가 위기에 빠졌다. 제군은 곧 패했고 제경공은 달아났다. 이에 만일을 대비해 방추보는 제경공과 자리를 바꿨다.[* 즉 자신이 제경공인 척해서 대신 표적이 되려는 의도였다. 비슷한 사례로 훗날 후한 시대 때 [[조무]]가 주군인 [[손견]]이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붉은 두건을 자기가 두르고 적군의 이목을 끌어 손견이 무사히 달아날 수 있게끔 한 것이 있다.] 과연 전차로는 갈 수 없는 길에 걸려 더 달아나지 못했고 그들은 사로잡혔다. 경공을 추격해온 진(晉)나라의 [[한궐]]이 짐짓 방추보에게 엎드리며 말했다. "우리 군주께서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원하라 하셨습니다."[* 당연하지만 제경공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조롱하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한궐이 누가 경공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방추보는 태연히 경공인 체하며 거우 행세를 하던 경공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했다. 이에 경공도 상황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당연히 방추보는 잡힌 상태로 끌려갔고 그를 보고 속은 것을 깨달은 극극은 방추보를 제거하려 했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러자 방추보가 대답했다. "군주를 대신해 죽는 것은 진정한 충정이오." 극극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 충정에 감동해 그를 놓아 주었다. 그리하여 방추보도 무사히 제나라로 복귀했다. 진(晉)나라가 마릉(馬陵)[* 바로 [[손빈]]과 [[방연]]이 마지막으로 싸운 그 마릉 땅 맞다.] 땅까지 추격하자 제경공은 보물을 바치며 물러나 달라고 요청했으나 진(晉)나라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 대신 극극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소동숙(蕭桐叔)의 딸(제경공의 어머니인 소 태부인)을 볼모로 넘기고 제나라 밭의 이랑을 동서 방향으로 터라![* 제나라와 진나라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는 곧 언제라도 우리가 너희를 압박할 수 있게 쳐들어가기 쉽도록 길을 트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물러나 주겠다." 그 무리한 요구에 제경공이 대답했다. "태부인은 과인의 어머니요, 진나라 군주께서도 어머니가 계실 것이외다. 의를 내세우며 우리를 정벌하는데, 이렇게 포악하게 굴어서야 되겠소이까?" 결국 극극은 이걸로 타협을 보았다. "좋다. 그러면 대신 노나라와 위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줘라." 제경공은 그 요구를 들어주어 결국 전쟁은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