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사망 === [[원나라]]에서 열린 아들의 혼례를 보고 귀국하고 얼마 안 된 1297년([[충렬왕]] 23년), 제국공주는 수강궁 향각에 있으면서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키고 이 작약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 병이 들었다. 3일 후인 음력 5월 12일 [[충렬왕]]과 제국공주는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는데, 제국공주는 음력 5월 21일 현성사에서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능은 고릉(高陵)이며, 같은 해 9월에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의 시호를 받았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음력 8월 14일에는 아들 충선왕에 의해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되었다.[* 음력 1월에 [[충선왕]]이 제국대장공주를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라고 불렀는데, 다음달에 충선왕이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칭호를 덧붙여야 한다"고 했고 실제로 태후로 추존된 것은 8월이므로, 당시 충선왕은 제국대장공주가 자신의 어머니라서 그녀의 시호의 왕후 부분을 왕후라고 부르지 않고 '태후'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310년(충선왕 2년) [[충선왕]]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며, 그녀에겐 조카 손자가 되는 [[원무종]] 카이샨이 그녀를 '황고 제국대장공주'(皇姑 齊國大長公主)에 추봉하였고,[* 이는 성종 사후 황위 다툼 중 충선왕이 무종 즉위에 앞장서준 공로도 참작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충선왕은 심양왕(심왕)의 직위까지 받으면서 2개의 왕직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해 음력 9월 [[충렬왕]]과 함께 태묘에 부묘되었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고 약 2달이 지난 1297년([[충렬왕]] 23년) 음력 7월 27일, [[원나라]]에서 부고를 접하고 귀국한 세자 [[충선왕]]이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임금의 총애를 투기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범인으로 지목된 [[충렬왕]]의 후궁 [[무비]]를 국문한 뒤 처형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둔 후, 예쁜 과부 하나(훗날의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안평공주는 사후 황제의 고모를 뜻하는 '대장공주'(大長公主)로 높여졌으며[* 실제로 [[원나라]] [[원성종|성종]], [[원무종|무종]], [[원인종|인종]]의 고모다.] 안평현에서 제국(齊國)으로 탕목읍이 확장되었다. 원 무종은 원 성종 사후 혼란을 틈타 집권했는데 정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1307년과 1308년 각 나라의 위호를 남발했다고 한다. 이런 혜택은 무종을 옹립시킨 [[충선왕]]에게도 적용되어 1307년 충선왕은 2자왕인 심양왕(瀋陽王)이 되고 1310년 1자왕인 심왕(瀋王)으로 승봉되었다. 하지만 충선왕이 심양에 대한 통치권을 회수당한 걸 보아, 제국대장공주 추존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차원으로 보인다. 이는 이후의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