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애매했던 처지 === 제국대장공주가 존호를 가진 것은 [[고려]]에서 월권으로 책봉한 '원성공주'가 최초고, [[원성종|원 성종]] 테무르 칸으로부터 '안평공주'로 책봉된 것이 2번째다. 기록으로만 보면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로부터 존호와 위호를 모두 받은 시기는 아버지 [[쿠빌라이 칸]]이 죽은 뒤였다. 기록상으로 존호와 위호를 받은 것은 원 성종이 최초이며, 원 성종이 공주 위호 사용도 지적한 걸 보면 공식적인 존호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원 성종 즉위년 [[고려]]의 요구 조건을 보면 [[충렬왕]]의 작호를 더해달라고 요청한 반면 제국대장공주는 책봉을 요구했다. 또 안평공주 책봉 이후에는 고려에서 원성공주라 부른 반면 원나라에서는 쿠툴룩켈미쉬라고 불렀다. 단 몽골은 서구식 인명호칭을 선호했기에 이것만 가지고는 책봉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쿠빌라이 칸]]이 죽자 [[충렬왕]]과 원성공주 부부는 원 성종에게 책봉을 요구했으나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겠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이후 25일 동안 소식이 없자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상도(上都) 개평부를 출발했다. 그러다 1달 뒤에 고려로 돌아가던 도중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원 성종은 인장을 거부하고, 6개월 뒤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아내 소생[* 보다 정확하게는 옹기라트부 출신 여성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하였다. 하지만 몽골에서 [[공주]]의 책봉 영역은 넓어서, 왕의 딸도 공주로 책봉했다. 심지어 [[충숙왕]] 제3비 [[경화공주]]는 《[[고려사]]》에서 몽골 여자로만 자칭하고, 경화부(慶華府)에서 따와, 충숙왕의 생모 야속진과 마찬가지로 황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사》를 보면 [[쿠빌라이 칸]]의 손녀나 증손녀도 책봉되었음이 확인된다. [[원성종|원 성종]]이 [[쿠빌라이 칸]]과 달리 [[충렬왕]]을 질색한 건 사실이며, 충렬왕 20년에 안평공주로 책봉했음에도 다음해 고려에서 인장을 내려달라 요구한 걸 보면 원 성종은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쿠빌라이 칸 이래 적서구별이 강화되었기에 공주가 아니라고 했지만, 카안의 딸이 정말 공주가 아니었을 리는 없다.[* 이는 원 성종의 처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가 거의 말년에 얻은 딸로, 손자들과의 나이가 크게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쿠빌라이가 장수하면서 살다가 손자가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은 거의 사망했거나 곧 갈 상태였겠지만, 제국대장공주는 팔팔한 상황에서 몽골의 1인자보다 윗사람이 되는 것이었기에 굉장히 거북한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몽골의 후계 방식이 일족들이 모여서 쿠릴타이에서 추인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반드시 이 카안의 고모로서의 위치를 상실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로 시집올 때 제왕이나 공주에게 주어지는 케시크를 거느리고 있었고 몽골족에게 공식적으로 공주라 불렸기에, 책봉과 상관없이 [[공주]]였던 건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