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고려의 왕비 === 16세 때인 1274년([[원종(고려)|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39세의 세자 심(諶, [[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 음력 6월 고려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제1비가 되었다. 원래 충렬왕은 1260년(원종 원년) 이미 [[신종(고려)|신종]]의 손자 시안공 왕인의 딸([[정화궁주]])과 결혼하여, 왕씨는 이미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왕씨보다 14년이나 늦게 혼인한 제국대장공주가 상국인 [[원나라]]의 [[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의 위치를 차지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 해 음력 10월 충렬왕을 따라서 [[고려]]에 들어왔는데, 충렬왕은 [[원나라]] 식으로 [[변발]]을 하지 않은 신료들을 꾸짖기까지 하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원성전(元成殿)과 응선부(膺善府)를 중심으로 잣과 인삼, 은, 모시를 [[원나라]]의 강남에 수출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시|광주]]의 흙을 가져와 강화에서 직접 [[도자기]]를 굽도록 하여 질 좋은 도자기를 수출하기도 하는 등 사사로운 경제 활동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1275년 10월 임자일, 고려에서는 원나라의 계속되는 공녀 요구에 호응하듯 전국 처녀들의 혼인 금지라는 초유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 백성들은 딸들을 모두 숨기거나 시골 깊숙이 보내기도 하고 혹은 절로 보내기도 하였다. 하도 딸을 숨기는 바람에 밤중에 뒤져서 끌어가기도 하였는데 공녀 선발시에 제국대장공주가 충렬왕과 함께 인물, 집안, 재주 등을 직접 보고 선택했다고 한다. 그녀는 본국의 친정에 들어갈 때마다 공녀를 뽑아갔으며, 원나라 궁중에는 고려 여성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원나라 황제는 외국의 유공한 사람들에게 물건 주는 것처럼 고려 여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그 영향으로 1275년(충렬왕 1년) 고려의 관제는 모두 한 단계 격하된 형태로 개편되었다. 이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가 되었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이부와 예부가 합쳐져 전리사가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오면서 [[원나라]]에서 자신의 시종들을 그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고려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몽골 풍습을 유지하여 고려에 몽골 풍습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밖에 연회를 즐기기를 좋아하였는데,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연회를 즐기는 경우가 있었다. 또 제국대장공주와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하였다. 조인규는 국가 재물을 횡령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고했음에도 단지 제국대장공주와 친분이 있어 귀양에서 금방 풀려나고, 훗날 감찰대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제국대장공주는 [[왕비]]다운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잦은 사냥을 나가며 국고를 낭비하고 민폐를 끼치던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간하는 등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성격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들 중 잘못을 하는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저 위에선 친분 있으면 죄 지어도 봐줬다며?~~ 또 상업에 재주가 있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 몽골 제국의 [[실크로드]]를 통해 [[고려]]의 물산을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과 [[아랍]]에까지 팔아 전 세계에 'KOREA'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잣과 인삼 등의 경우 그것이 나지 않는 지방의 백성들에게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고려인들이 심히 고초를 겪었다. [youtube(t4MxD2dC1sI)]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에는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그런데 제국공주가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내로 뺏어오고, 그 금탑의 장식은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 홀라대(忽刺歹), 삼가(三哥) 등이 훔쳐가는 일이 있었다. 제국공주는 원래 이것을 해체하여 사적으로 쓰고자 했는데, 충렬왕이 이를 못하게 했지만 제국공주는 말을 듣지 않고 울고불고 고집을 부렸다. 얼마 후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다시 [[흥왕사]]에 행차하였는데, 흥왕사의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제국공주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더해 태부사의 은을 모두 거두어 대궐로 들여갔다. 나중에 충렬왕이 중병에 걸려 재상들이 황금탑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겨우 허락하였다.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어떤 이가 당시 [[고려]]에 [[다루가치]]로 와 있던 [[석말천구]]의 관사에 한 익명서를 투입하는 일이 있었다.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익명서를 투입한 후 곧 "옷이 있거든 입고 밥이 있거든 먹어 다른 이의 소득이 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익명서가 투입된 다음날 석말천구가 이러한 사실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에게 고하였는데, 그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제국공주를 저주하고 있다. 또 [[제안대군(고려)|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분개한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를 나장(螺匠)에 가두고 그녀의 부고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류경]]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제국대장공주가 감동하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정화궁주]] 등을 모두 석방시켰다.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에는 충렬왕과 제국공주가 천효사(天孝寺)에 갔는데, 제국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며 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다. 이때 제국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고, 제국공주의 화가 조금 풀려 다시 천효사에 갔는데, 이때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며 또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 한편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 [[쿠빌라이 칸|원 세조]]가 충렬왕을 [[부마|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하였다. 1282년(충렬왕 8년) 음력 8월에는 [[쿠빌라이 칸|원 세조]]가 [[충렬왕]]에게 옛 [[송나라]]의 의관인 [[연덕신]](鍊德新)을 하사하였는데, 연덕신이 [[정력]]이 강해지는 약인 '조양환'(助陽丸)을 만들어 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천문가인 [[오윤부]](伍允孚)가 '이 약은 왕의 몸에 좋지 못하니, 삼한의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자다.'라고 하였고, 정말 [[충렬왕]]이 그 약을 먹은 후 결혼 초 해마다 태기를 보이던 제국대장공주는 다시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다. 한편 오윤부는 [[충렬왕]]이 태묘에 새로운 신위를 모시면서 이에 [[제사]]를 지낼 때, 제국대장공주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태묘는 조상의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제국대장공주가 새 궁궐의 신축 공사를 벌이자 하늘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음을 들어, 제국대장공주에게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덕을 닦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궁궐 신축을 벌이는데, 이때 제국대장공주는 오윤부에게 택일을 명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