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대학 (문단 편집) == 기타 == * [[일본제국]] 시절, 제국대학 출신은 같은 일을 해도 봉급을 더 받는 등의 우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등문관시험]] 준비를 위해 [[경기도청]] 고원으로 있었던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김영재는 65원의 월급을 받았다. [[구제중학교]] 졸업자는 30원,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는 40원, 일본 사립대학의 졸업자는 45원의 임금을 받은 데 반해 제국대학 졸업생은 65원의 최고 수준 봉급이 주어졌던 것이다.[* 출처: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p.49] 또한, 전쟁 전 [[미쓰이 그룹|미쓰이]], [[스미토모 그룹|스미토모]],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 등 재벌계 [[대기업]]의 평균 초봉은 제국대학과 [[구3상대|상대]]는 80엔, [[고등상업학교]]나 [[소케이]]는 70엔, 그 외 사립대학은 60엔이었다고 한다.[* 출처: 早稲田と慶応 名門私大の栄光と影 - 橘木 俊詔 (著)] >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 >- [[신동아]], 2005년 12월호 <경성제국대학 입시 대소동> 中.[* 해당 기사에서 "(제국대학의)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오류다. 일본에서 교원자격증이란 것이 제정된 것은 전후인 1949년이기 때문이다. 또 이는 당시의 상황으로 대단한 특혜도 아니었던 것이, 전전 일본 교원은 대학 출신도 아닌 전문학교급인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에서 1950년대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경성제대 법문학부가 전신이었던 문리과대학이 경성사범학교가 전신인 사범대학을 괜히 없애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다. 급이 안 맞았기 때문. 물론 '원한다면' 제대 출신이 각급학교의 교원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대학의 교원이 되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은 제대 출신의 특혜였지만, 그 자격이 '자격증'이라는 형태로 있었던 적은 전전에도 전후에도 없으며, 문학부 출신으로 제한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전전 일본에서 석사 학위자 이상이 구제 고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이는 구제 고등학교 교원이 대학의 교원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구제 고등학교는 신제 고등학교와는 달리 고등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에게만 열린 문호였던 것은 아니다. 참고로 1950년대에는 한국에도 이 관행이 남아 있어서, 대학에 자리를 나기 기다리면서 고등학교에 재직한 적이 있던 교수들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 말기[* 1910년대 초 즈음이라 당시의 [[대학]]이라곤 제국대학뿐이었고, 그중에도 먼저 설립된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이다.]의 관립/사립학교 문과 졸업생의 초봉 격차를 "제국대학 100엔에 대해서 히토츠바시[* 당시 [[고등상업학교|도쿄고등상업학교]]] 60~70엔, 게이오 50~60엔, 와세다는 30~40엔을 동등한 것"으로 본다. >---- > 오자키 모리테루[* 尾崎盛光. 전후 도쿄대학 문학부 사무장을 지냈다.] 일본취직사(日本就職史) 中. >사립대학이 정식 [[구제대학]]으로 승격한 [[다이쇼 시대]] 이후에도 엄연한 급여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이쇼 버블 시대의 닛폰유센(日本郵船)에서는 제국대학, 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 졸업생의 초봉은 80엔, 와세다·게이오와 지방[[고등상업학교]]가 60~65엔, 소케이를 제외한 사립대학이 50~55엔이었다. 대체로 '''제대'''(帝大) - [[히토쓰바시대학|상대]](商大) - [[소케이]](早慶) - 기타사립대학이라는 순서로 평가받으면서 사립대학 출신은 기업에 취직하더라도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 >- 주모쿠 고사이(寿木孝哉) 취직전술(就職戦術) 中.[* 웹사이트 출서 [[https://kangaeruhito.jp/article/8635|反東大の思想史]] 참고.] * 일본제국 시절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도 제국대학에 (어디까지나)버금가는 수준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당연히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학비 [[무료]]에 관료 임용까지 보장한다는 특전, 그리고 징병 징용대상에서 면제된다는 점 때문에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제국대학의 경우도 대학생들 중 가장 늦게까지 징병이 면제되긴 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 문학부-의학부 순서로 학병 징집되었다. 그러나 군수와 직결된 분야인 공학부는 끝까지 징병이 이뤄지지 않아서 공학부 인기가 의학부보다도 높았다고.] 하지만 건국대학이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최고학부이다 보니 만주국에서는 알아줘도 일본제국 본토에선 대접받지 못했다. 입학도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 전기/후기 과정으로 나누어져 전기가 대학예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고 후기가 본과 과정을 담당.] 그래도 그나마 전쟁 당시에는 위세를 부릴 수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제국대학 출신들 특히 숫적으로 가장 많았던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참고로, 이 건국대학의 학맥은 현재 이어지지 않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대학]] 문서 참조. * 당시 제국대학 학생들의 복식과 관련해서는 [[https://m.blog.naver.com/thals8282/222524744680|블로그]] 참조 * 1900년대 초반에 현재의 [[가나자와대학]]을 제국대학으로 승격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가칭은 호쿠리쿠제국대학(北陸帝国大学). 제국대학 승격을 두고 [[관립대학|관립의과대학]]인 [[니가타대학|니가타의과대학]]의 전신인 니가타의전을 보유하고 있던 [[니가타현]]과 [[이시카와현]]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구제고등학교]]인 제4고가 소재해있던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한다. * [[호쿠리쿠]] 지방 외에도 제국대학이 설치되지 않았던 [[주고쿠]]와 [[시코쿠]] 지방에도 제국대학 설립 청원이 제국의회에 제기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후보지를 두고 유서 깊은 [[관립대학|오카야마의과대학]]의 전신인 [[오카야마대학|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를 둔 [[오카야마현]]과 주고쿠 지방의 중심지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 [[관립대학|히로시마문리과대학]]의 전신인 [[고등사범학교|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가 소재한 [[히로시마현]]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 [[2차대전]] 패전 후 기존의 학제를 개편하는 과정에 미군정 [[GHQ]] CIE[* 문교부에 해당]는 1947년 기존 내지의 제국대학 7곳에 더해 [[호쿠리쿠]], [[주고쿠]], [[시코쿠]] 등지에 3곳을 신설한 '''국립종합대학''' 10개교만 국립(관립)으로 두고, 나머지 [[관립대학]] 및 관립[[구제전문학교|전문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은 전부 지방 [[도도부현]] 소관으로 이관하여 [[공립학교]]로 삼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한다. [[가나자와대학]] 50주년 [[http://muse.w3.kanazawa-u.ac.jp/50th/sousetsu/iinkai/index.html|기념페이지]] 참조. * 전후에는 이 10개 국립종합대학안과 별개로 여자교육의 진흥을 위해 수도권과 [[간사이]] 지방에 여자제국대학을 설립하는 구상이 제시된 적도 있다고 한다. [[고등사범학교|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여자제국대학으로 격상시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며, 역시 여자고등사범학교로 긴키지방의 유력한 유일 후보였던 [[고등사범학교|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는 이에 호응해 나라여자제국대학 승격 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실패.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지 못한 두 여자고등사범학교는 각각 [[오차노미즈여자대학]]과 [[나라여자대학]]이라는 두 국립 [[여자대학]]으로 승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