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다 (문단 편집) === 근현대 === [[파일:제다 사우디 1938.jpg]] 1938년의 제다 1866년 하베쉬 에얄레트 명칭의 유래이기도 한 홍해 서해안이 이집트에 할양되자 제다 관할에는 히자즈만이 남았다. 따라서 제다 에얄레트라 불리다가 1871년 제다 무타샤르프를 거쳐 1872년 히자즈 빌라에트로 편성되었다. 다만 마지막 개편으로 총독은 제다가 아닌 메카에 샤리프와 함께 상주하며 히자즈 지역에 대한 오스만 조의 중앙 집권력을 확대하였다. [[1차 대전]] 중인 1916년 6월, 영국의 지원으로 [[샤리프 후세인]]은 오스만 조에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메카에서 오스만 군은 1917년 7월까지 저항했으나 제다는 봉기 직후에 [[하심 가문]]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후 10여년간 [[헤자즈 왕국]]의 주요 항구로 중시되었다. 하지만 1924년 3차 사우디 국가 (네지드 술탄국)의 히자즈 정복이 개시되었고, 그해 12월 메카가 점령되었다. 샤리프 후세인은 아들 알리에게 양위하고 잔여 병력을 모아 해상 보급이 가능한 제다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였다. 옛 성벽은 보수되었고 주변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5만에 달하는 네지드 군에 비해 헤자즈 왕국군은 5천에 불과했지만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 및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의 지원으로 8대의 전투 비행기[* 2대의 노후 비행기에 나머지는 이탈리아에서 신규 구매], 40문의 대포, 30정의 기관총, 10여대의 독일제 탱크까지 당대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일대의 부족들이 사우드 왕가로 돌아선 상태라 하심 가문은 도시 내에서도 고립되었고, [[아카바]]에서 오는 보급선은 종종 지연되었다. 전세를 바꿀만한 전투 비행기 역시 넉넉한 물량에 비해 조종사는 겨우 2명에다 그마저도 한명이 전투 초반에 사망하자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10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더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여긴 제다의 유지들은 항복을 결의하였고, 샤리프 후세인의 참모 모하메드 아부 젠다의 주도 하에 영국의 중재로 이행하였다. (12월 23일)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입성하자 샤리프 후세인과 알리는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망명하였다. 제다 입성 후 히자즈 왕을 칭하던 압둘아지즈는 이듬해 네지드 술탄국을 히자즈-네지드 왕국으로 개편하였고, 1928년 구도심 남쪽에 쿠잠 궁[* 1963년 왕실 영빈관이 되었고, 1995년 그 일부가 지역 고고인류학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을 세웠다. 여담으로 궁의 건설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조부인 기업가 모하메드 빈 아와드였다. 1932년 히자즈와 네지드의 왕위가 합쳐지며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출범하였고, 제다는 수도 리야드 서쪽 메카 주의 일개 도시로 편입되며 중요성을 잃었다. 1947년 구도심의 성벽이 허물어졌고, 1982년에는 구도심에서 화재가 발생해 중심부의 옛 건물 몇몇이 소실되었다. 다만 1979년 조사 당시 등록된 1천여 고택들 중 대부분은 잔존하였고, 1990년 제다 역사지구 보존국이 설립되며 관리되고 있다. 한편 성지 순례 수요 및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며 90년대 들어 시가지는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고, 제다는 거대한 광역권을 지닌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2020년대 사우디의 관광 장려 정책에 힘입어 제다는 사우디의 주요 관광 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다.[* [[빈살만]] 왕세자는 1300만 달러를 들여 구도심의 보수를 지시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