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위왕 (문단 편집) === 《[[사기(역사책)|사기]]》를 참조한 기록 === 즉위 후부터 정사를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경•대부에게 맡겼다. 9년이 되도록 제후국들이 제나라를 공격해도 제나라의 사대부들은 개의치않아 했다. 제 위왕은 즉묵의 대부를 부르면서 매일 헐뜯는 상소가 빗발쳤다면서 사람을 시켜 확인하니 즉묵의 상태는 좋다고 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매수해 환심을 사지 않았다면서 즉묵의 대부를 10,000호의 고을에 봉했다. 아읍의 대부를 불러 말하면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아읍을 살펴보니 아읍의 상태가 전혀 안 좋았다면서, 예전에 [[조(전국시대)|조나라]]와 [[위(전국시대)|위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물리치지도 못했지만 자신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보물을 통해 주위 사람들을 매수해 좋은 말만 하게 했다면서 아읍의 대부를 가마솥의 끓은 물에 삶아죽였다. 또한 사람을 색출해 아읍의 대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자를 모두 삶아죽였으며, 군사를 일으켜 조, 위 등을 공격해 빼앗긴 땅을 찾아왔다. 위나라의 군사를 추격해 탁택에서 포위했고, 이에 [[위혜왕]]이 관 땅을 바치면서 화의를 요청했으며, 조나라에서는 장성을 돌려주었다. 이로 인해 제나라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두렵게 했다. 제후들이 이로 인해 이후 20여 년간은 함부로 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고 [[추기]]를 등용해 간언을 받아들이고 어진 사람들을 등용했다. 기원전 356년, 조나라의 왕과 평륙에서 회견하였다. 기원전 355년, [[위혜왕]]과 사냥에 나서면서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위 혜왕은 구슬이 달린 수레를 보물로 말하고 제 위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보물로 이야기했다. 기원전 335년, 제나라의 견 땅에서 위 혜왕과 회동했다. 기원전 332년, 연, 조, 초 등과 위(衛)나라에서 만나 위(魏)나라를 제외시키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같은 해에 제나라의 전반, 위나라의 공손연이 위, 제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공손연이 전반을 설득해 위, 제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자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 조나라에게 패할 것을 우려해 위 혜왕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가서 조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기원전 323년, 부인이 죽자 7명의 처첩이 있어서 제 위왕은 처첩을 모두 총애했는데, [[맹상군]]으로부터 7개의 귀고리를 받으면서 그 중 특별히 훌륭하게 만든 1개의 귀고리가 있었다. 다음날 가장 아름다운 귀고리를 하고 있는지 확인해 그녀를 부인으로 삼도록 권고받았다. 기원전 321년, 정곽군([[전영]])[* [[맹상군]]의 부친으로 유명하다.]으로부터 관의 회계 기록에 대해 매일 듣고 자주 열람해야 한다는 간언을 들었는데, 5일 만에 싫증내서 정곽군이 일임하도록 했다. 추기로부터 조정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대왕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신하들은 대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대왕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대왕의 시야가 가려져 있다는 간언을 하자 제 위왕이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는 사람을 상급의 상, 글로 지적하는 사람을 중급의 상, 시정에서 왕을 비방해 그 소문이 들어오게 하는 자를 하급의 상을 받을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간언하는 신하들이 많다가 몇 달 뒤에는 가끔 간언하는 자만 있게 되고, 1년 후에는 간하고 싶어도 간할 것이 없게 되자 연, 조, 한, 위 등의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고 제나라에 조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