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헌의회그룹 (문단 편집) == 분화 == 지도부 검거 이후 이들은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으로 결집한다.[* 이때의 지도부 중의 한명이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1961)|박종운]]이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CA는 독자출마한 민중후보 [[백기완]][* 백기완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진보운동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존재로 197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어떤 특정 정파에 속한적도 없고, 백기완의 사상도 그 어떤 정파와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재야민주화운동그룹, 학생운동 세력 일부의 추대를 받아서 출마한 것이지 백기완이 CA그룹 소속이었던 것이 아니다.][* 이당시 백기완 선본의 주력은 제헌의회 그룹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었다. ]을 지지하며 대규모 거리유세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백기완 후보는 자신이 제기한 민주연립정부[* 김영삼-김대중-재야 3자연대.] 제안이 무산되자, [[김영삼|양]][[김대중|김]]후보 단일화를 촉구화면서 선거운동 도중 사퇴하였다. 반면에 [[NLPDR|NL]]은 정권교체 구호를 들고 제도권 정치인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통일에 유화적인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로 결집하면서 비록 대선은 패배했지만, 대학가에서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대선 이후 벌어진 논쟁속에서 CA그룹의 다수파는 대중운동속으로 산개할 것을 주장하며 88년말 조직을 해산한다. 이들 대다수는 NL의 대중노선을 따라 자주파에 흡수되는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NL주류와는 달리 남한의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주장하여 비주사NL(혹은 NL좌파) 노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대협]] 5기 김종식, 6기 태재준 의장(소위 관악자주파)이 이 흐름을 대표하며, 이후에는 [[PD(정파)|PD]] 일부 그룹과 결합하여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이어진다.[* 21세기는 CA는 물론이고 NL, PD 어떤것도 내세우지 않았고 정파 구분을 넘어서는 학생운동을 표방함.] NL에 합류하지 않은 CA 소수파는 기존의 NDR론을 계속 주장하며(그래서 '''ND'''라고 불리웠다.) 노학연대와 70말 학번의 좌파 노동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표방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 을 목표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건설해 활동한다. 이들은 91년 사노맹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결속력이 약화 되었다. 이후 92년 대선의 [[백기완]]선거운동본부에서 활동하며 PD그룹과 섞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