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후 (문단 편집) ==== [[후한]] 말 ==== [[한나라]]도 [[환관]]의 횡포와 무능한 [[황제]]들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지방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이것이 [[삼국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직전의 후한 말이다. 이때에는 [[조조]], [[유비]], [[손권]], [[원소(삼국지)|원소]], [[유표#s-1]]등의 지방의 [[군벌]]들이 [[군웅할거]]하기 시작해 과거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의 [[난세]]가 펼쳐졌다. 그런데 이때는 [[춘추전국시대]]와 다른 양상이 있다. 이전의 지방 군웅들은 '제후'의 작위에 있는 자들로서 제후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왕, 공, 후 등등의 작위로 호칭되며 자기 영지에서 합법적인 정치 주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후한 말의 [[군웅]]들은 [[목(관직)|주목]], [[자사(관직)|주자사]], [[태수]], [[장군]], 교위 등등 제후의 '[[작위]]'가 아닌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는 이들이 지방에서 땅을 분봉받아 그 안에서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제후'가 아니라, 순전히 중앙 정부의 임명을 받아 지방에 부임하여 중앙 정부의 주권을 대행하는 '지방관'으로서 임명된 사람들임을 뜻한다. 후한은 이전의 [[주나라]] 혹은 [[전한]] 초기와는 다르게, [[봉건제]]나 [[봉건제]]적 요소가 절충된 [[군국제]]가 사라지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완성한 상태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의 지방관료였던 군웅들이 마치 제후처럼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 쟁탈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한나라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붕괴하고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진 [[붕괴 후 혼란기|후한 말의 혼란기]]에서 군웅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득세하여 나타난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사실 이들은 원칙적으로 그럴 권한이 없었다. 이들은 제후같은 자기 지역의 [[군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후로 분봉되지만 않았을뿐 실질적으로는 제후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오정후'(烏程侯) [[손견]]처럼 일부 군웅들 중 작위를 받아 법적으로 제후인 자들은 있었다.] 이후에 유씨만 왕이 될 수있다는 [[유방(한고조)|유방]]의 유훈을 깨고 승상 [[조조]]가 한황실을 겁박하여 위왕에 오르고 수도를 [[업성]](邺城)에 두어 자체적인 조정을 갖춘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유비]]와 [[손권]]도 각각 한중왕과 오왕에 오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