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광래호 (문단 편집) == 취임 == [[파일:/image/076/2013/05/23/2013052401001850900150841_59_20130523155610.jpg]] 조광래는 취임할 때 많은 축구팬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가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대한축구협회|축구협회]]의 주류였던 허정무에 대조되어 더 환영받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편견이다. 조광래는 청소년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연세대-상무-화랑 팀을 거친 대표적인 엘리트 선수였다. 차범근 허정무 조광래는 화랑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이들이 차례로 대표팀을 맡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지도자 생활도 대우-수원-안양-서울 등 당대의 명문팀만 거치다가 잠시 공백기를 갖고 경남을 맡은 것이다. 결코 비주류가 아닌 비장의 카드라고 보아야 옳다. 조광래 감독이 축구계 비주류로 여겨진 이유는 1993년 이후 지속된 정몽준 체제의 운영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 일명 축구계 야당인사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지배적이다. 2003년 베스트 일레븐 지와 인터뷰만 봐도 90년대 후반에 스포츠신문에서 당시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를 정몽준 빽으로 버틴다고 대놓고 비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빡돈 조중연이 프로축구연맹에 항의하여 감독 자리에서 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가 축구연맹회장이 거절한 일도 있었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2009년 축구협회 회장선거 당시 조중연 회장후보도 정몽준 체제의 연장선상이라면서 반대후보인 허승표씨를 지지했다.[* 이들의 다툼을 뿌리깊은 연고대 학맥 다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조중연은 고려대 출신이고, 보통 그 반대에 섰던 허승표, 신문선, 조광래가 연세대 출신이다. 다만 실제로 조중연과 가까운 인사 중 이회택, 황보관 등은 고려대 출신이 아닌 점을 두고 볼 때는 지나치게 단순한 프레임이다. 이것은 親조중연 인사인 허정무(연세대)와 위명에 비해 축협에서 야인취급 받는 차범근(고려대)의 경우를 봐도 학맥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 ] 다만 이 부분은 사정을 잘 모르는 네티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나 지금이나 축구협회 회장은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국대'''가 국민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던 만큼 [[높으신 분들]]의 관심도 높았고, 그만큼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 거쳐갔다. 역대 축구협회 집행부 목록을 보면 뭥미? 소리가 절로 나는 이름들이 회장으로 나오는데 [[여운형]], [[신익희]], [[윤보선]], [[장택상]] 등이다. 방금 머리에 떠올린 그 [[전국구]] 정치가들이 맞다. 백번 양보해서 이 때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넘긴다손 쳐도, 1960년대 [[최치환]]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 출신인 국회의원이자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었고, 1970년대 [[장덕진(1934)|장덕진]] 회장은 행시, 사시, 외무고시를 패스한 국보급 천재에다 [[육영수]] 여사의 조카와 결혼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직책이 청와대 경제 [[수석비서관]] & 재정차관보. 그 뒤를 이은 고태진 회장은 조흥은행장, [[김윤하]] 회장은 국회의원, 80년대 [[최순영(기업인)|최순영]] 회장은 신동아그룹 회장,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 회장,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사람이 바로 정몽준 회장으로 현대중공업 고문이다. 참고로 정몽준의 대항마라는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은 GS그룹 허만정 회장의 아들이다. 그리고 정몽준 회장의 뒤를 이은 [[조중연]] 회장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선수 출신 회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1990년대에 이종환 회장이 선수출신으로서 축구협회 회장을 맡긴 했지만 약 4개월간의 회장직 대행이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는 조중연 회장을 최초의 선수출신 회장으로 지칭한다.] 저 엄청난 감투들만 봐도 알겠지만, 조중연 회장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정재계 파워 엘리트가 아닌 이상 꿈도 꾸기 힘든 자리이다. 그리고 월드컵, 올림픽 진출, 아시안컵을 포함한 각종 대회 우승 등의 유형 무형의 '''실적'''을 내리라 기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순간 국민들의 분노와 함께 여태까지의 위상과 상관없이 대다수가 감독과 함께 냉정하게 떨려나갔다. 흔히 재야 인사로 알려진 [[신문선]] 같은 경우 김우중 시절부터 시작해서 정몽준 시절 축구협회 이사직까지 역임했고, [[이용수(축구)|이용수]] 역시 기술위원장을 역임하며 [[거스 히딩크]]를 강력하게 [[쉴드]] 친[* 사실 2002년 이전까진 히딩크에게 명줄을 맡긴 공동운명체였지만, 4강신화 이후 논공행상를 하는 과정에서 섭섭한 대우를 받았다고 정몽준과 결별했다.] 바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아무리 [[언플]]하며 고고한 척 해봤자, 좁은 축구판에서는 정몽준 현대 계열과 허승표[* GS에서는 허승표와 선을 그은 상태다.]계열 '''양대 라인''' 중 어디를 탔느냐 입장 차이일 뿐이다. 다만 조광래가 대표팀 감독으로서 동년배 감독들에 비해 순위가 한참 밀린 것은 분명한데,[* 순위가 밀렸단 말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이미 1992년에 대표팀 코치를 맡았었다. 위의 스태프 커리어 표 참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s-2.1.1|여기]]도 같이 참고. 이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은 김호 감독이었다.] 이는 격한 성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전술한 김호 감독과 불화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나지만 뭔가 아니다 싶으면 속에 담아두지 않고 곧장 내뱉는 스타일이라 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을 소지가 다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 5월 올림픽대표팀 차출 문제를 놓고 이회택 부회장과 한바탕 붙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