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광조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조광조 일파를 두고) [[왕망]](王莽)의 일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 >금부도사 유엄, 조광조가 [[사약]] 받기 직전 자신의 일파와 조정 상황을 묻자 답하며. 원래 [[왕망]]은 [[유교]]국가에서 [[망탁조의|역적의 대표주자]]로 자주 비유되는 인물이지만, 왕망과 조광조의 행보를 비교해 보았을 때 지향점이 비현실적인 유교국가로의 개혁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절한 평이다.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는 밝은 [[정치]]적 감각에 의한 시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한 [[학자]]의 '''[[유교 탈레반|성리학 독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치철학자, 유학자, 교육자로는 몰라도 정치가나 행정가로서는 낙제점인 인물. 그리고 사실 개혁적이라는 평가 역시 그가 임기 내내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이게 어디가 개혁적인 건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수꼴]]로 보일 이야기 투성이었으며, 중종이 총애해주지 않았다면 대체 뭔 배짱으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막가파식 행보에 불과했다. 당장 생애 문서에서 언급되는 모든 행적이 태클 걸 점 투성이인데, 그가 관직에 나아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박상과 김정의 상소문을 두고 그들을 탄핵한 대간들을 대차게 까버리면서 '난 저런 놈들이랑 일 못하겠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을 전부 파직'''해주소서.'라고 중종한테 상소를 올리는 거였다. 즉, 막 들어온 신인 관료가 선배들을 상대로 [[캐삭빵]]을 건 거다. 그리고 그 다음 행적으로 논해지는 건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을 [[정몽주]]랑 같이 문묘에다 배향하려 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굉필이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무슨 학문적으로 성과를 낸 것도 아닌데, 오직 조광조 본인의 스승이라는 이유 하나호 정몽주랑 동급으로 취급하며 문묘에 올리려 든 거고 당연히 대차게 뜯겼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개혁책이랍시고 언급되고 있는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위훈 삭제 등은 아래에서도 자세히 다루지만, 그 어떠한 것도 사림의 위세 확대라면 모를까 조선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그나마 조광조 시절에 진짜 개혁책이라고 볼만한 건 '''노비종모법, 한전제, 대공수미법. 이 세 개가 끝'''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선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고, 폐단만 낳을 뿐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자질구레한 전통이나 규율에 얽매이면서 훈구파는 물론이고, 왕인 중종한테조차 유교 논리를 들먹이며 이걸 지켜야 한다고 허례허식에 매달리면서, 조금이라도 유교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등 아무리 봐도 개혁적인 성격의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조광조의 개혁적인 이미지는 현대에 와서 '훈구(기존집권층) VS 사림(신진관료층)'이라는 구도 때문에 조성된 거지, 실제로는 훈구들이 실무 위주의 관료층이었고, 사림은 문학을 파고들며 시골에서 행정 경험 없이 시나 지어대던 글쟁이들에 가까웠다. 현대 관료 체제로 보면 훈구는 시험을 봐서 차곡차곡 승진해 올라온 관료들이었고, 사림은 대학 같은 곳에서 강의를 하다가 추천으로 스카웃되어 그대로 정부 내 고문직을 꿰찬 별정직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래의 문제점들을 보면, 조광조가 정치철학은 몰라도 정치적ㆍ행정적으로는 대단히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물론 조광조는 정말 이례적일 정도로 출세하고 몰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경험부족[* [[석담일기]]에서 율곡은 조광조가 재능은 있었으나 경험을 쌓기 전에 너무 빨리 요직에 올라서 실패했다고 [[https://lshan12.tistory.com/53142|평가]]했다.]도 한 몫을 하겠지만. 조광조가 처음 벼슬에 오른건 중종 10년인데 기묘사화는 중종 14년에 일어났다. 즉 '''조광조의 모든 행적은 단 4~5년 동안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새파란 신참부터를 포함해서! 오늘날로 치면 [[폴리페서]]나 정치철학자가 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장관이나 비서실장 등 주요 요직을 맡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입안하다가 [[숙청]]당하여 몰락한 케이스에 비유할 수 있다.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그 개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실제로 [[관학파]]와 [[사림파]]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참조. 조광조가 정치가,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친 학자'라는 단점을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아래의 문서들이니 '생애'를 참조하면 알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의 구호는 성리학 질서, 도덕이지만 그의 행위가 정말 도덕적인지도 의문이다. 생에 문서에서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배향 문서나 김굉필 문서에 있는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그에 대한 평을 보면 자질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성과는 부족했다. 당시 김굉필의 배향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또한 김굉필이 배향되기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었을 정도. 그렇다고 유명한 제자가 많이 나오거나 학파를 이루었나? 그것도 아니다. [[김안국]], [[이장곤]] 등 여러 제자들이 있긴 했지만 이황의 제자들이 '퇴계학파'를 이루거나 그 수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김굉필의 제자로서 크게 할약한 이는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런 김굉필이 이런 논의가 나온건 추측하건대 딱 한가지 이유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이것 외에 그토록 유학적 성과가 부족한 그가 배향될 이유는 눈에 띄지 않는다. 문묘배향이라는 것이 결국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이기에 만일 정몽주와 김굉필이 종사되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이 완성되므로 조광조의 그 파벌의 입지는 더욱 든든해진다. 조광조가 이러한 점을 노렸는지는 모르나 중요한건 그게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노렸든 안 노렸든 노렸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 소격서 문제도 그렇다. 전근대 유교적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왕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따지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지적하며[* 물론 조선의 경우엔 진짜 비판해야 할 경우엔 진짜 돌직구를 날렸다. 선왕과는 달리 현재 재임하는 왕의 경우에는 '왕은 잘못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럴 때마다 지적하여 교정해주어야 하는건 신하들의 몫'이므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건 전혀 흠이 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왕이 상대인 만큼 적당한 선은 있긴 했지만.] 특히 선왕들의 잘못을 언급하는건 더더욱 신중해야 했는데[* 물론 선왕들이 아예 잘못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당연히 비판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비판은 했지만 이 때도 '그건 다 OOO이 왕에게 잘못된 말을 해서...", "사실은 XXX의 잘못..." 식으로 선왕이 빠져나갈 구멍 하나는 만들어두고 비판했다.] 예시로 연산군 즉위 후 성종의 장례에서 불사를 벌이는 것과 관련해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간 조선에서는 왕이 죽으면 수륙재를 베풀곤 했는데 정식 예법이 아닌데다 성종은 반불 군주였기에 논란이 벌어진 것인데 연산군은 혼자선 결정을 못내리겠던지 인수대비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고 인수대비는 조종조들도 다 행했고 불교를 없애란 말은 안 하였으니 안 할 수는 없다며 수륙재를 베푸는 쪽을 지지했고 연산군 또한 "조종조들께서 다 행하셨고 대행왕(성종)도 선왕(예종)을 위해 하신 일이니 나 또한 대행왕을 위해 하겠다." 며 지지하자 대간과 유생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이 때 연산군을 격노케 한 상소 한 장이 올라와 상소를 올린 유생들이 처벌받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때에 유생들은 연산군 입장을 지지하는 노사신을 비판하였는데 그 상소에서 "세조께서 불교를 좋아하셨지만 고작 십여년밖에 재위하셨을 뿐이고 말엽에는 역신들이 또 준동했습니다." 같은 선넘은 말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세조가 불교를 좋아한 것을 두고 "이게 다 노사신 때문입니다. 노사신 그놈이 세조대왕을 현혹하여서 그리 된 것이고 그 때문에 세조대왕께서 그르치실뻔 했습니다. (그러니 노사신을 처벌하소서)" 라고 "세조가 불교를 좋아한건 사실이고 잘못이나 그건 노사신 때문" 이라며 세조의 잘못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 잘못은 세조 자신만의 의지가 아니라 노사신이 세조를 잘못 보필했기 때문으로 한정했다. 그나마 저 선넘은 문구도 대신들이 "유생들이 뭘 잘 몰라서...", "잘못을 지적하려다 보면 선넘는 말이 조금 나오기도 합니다. '''처벌은 하지마소서'''" 식으로 대응했다. 이 시기의 대간, 유생들은 성종 시기를 거치며 엄청 강경해졌음에도 최후의 선까지는 넘지 않았고 그나마 선넘은 것조차 대신들이 "유생들의 본심이 아니고 쟤네들이 뭘 모르는데다 지적을 하다보니 잠깐 흥분한 모양이네요."로 대응해야 했다. 이와 비교해보면 조광조가 얼마나 선을 넘었는지 알 수 있다. 조광조는 명색이 성리학, 유교정치 복원을 외치는 사람이 '소격서를 없애지 않은건 '''세종과 성종의 잘못''''이라고 대놓고 돌직구를 때렸다. 마지막으로 현량과 문제도 현량과는 명목상 각 지방에 숨은 인재들을 발굴한다는 이유로 시행한 제도이지만 정작 뽑은 사람들이 정말 '''우연하게도''' 서울 태생의 명문가에 중앙에 대한 연줄이 있는 자들이었다. 거기다가 조광조와 가깝던 안당의 경우 자식 셋이 모두 현량과에 합격했다. 이것이 우연이라기에는 미심쩍다. 결론을 내자면 위의 3가지가 '''우연이 아니라면''' 조광조는 유교정치와 성리학 질서의 복원을 외쳤지만 뒤로는 원칙이나 자신의 구호를 파괴하며 자파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골몰한 것이 된다. 설사 모두가 그렇지는 않고 일부만 그렇더라도 그의 진정성에는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일. 이렇게 보면 유학자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는 '''왕도와 패도를 나쁜 의미로 섞어서 행하며[* 유교에서 패도는 좋은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예시로 회니시비의 포문을 연 서신에서 윤증은 송시열을 패도와 왕도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살아간 인물'''로 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