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모(삼국지) (문단 편집) === [[사마소]]와의 신경전 === 조모는 학문에 굉장히 관심을 가져 256년의 어느 날에는 태학(太學)을 시찰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주역]]》, 《[[상서]]》(尚書), 《[[예기]]》에 대해 하문했다. 이때 역학박사 순우준(淳于俊), 박사 유준(庾峻), 박사 마조(馬照)는 조모에게 연달아 발리고 [[데꿀멍]]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박사 유준과의 대화이다. >조모는 또 《상서》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질문했다. > >“[[정현(삼국지)|정현]]은 ‘계고(稽古)가 하늘과 같다는 것은 요가 하늘과 같음을 말한다.’라고 했고, 왕숙은 ‘요는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고 실행한다.’고 했다.[* 《상서》 <요전>(堯典)에 '약계고제요'(若稽古帝堯)라고 되어 있다.] 이 두 해석은 다른데, 어떤 것이 옳은가?” > >박사 유준(庾峻)이 대답하여 말했다. > >“전대의 학자들이 내린 해석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저에게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서》의 <홍범>(洪範)에서는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그 중 일치한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라고 했습니다. [[가규]](賈逵), [[마융]](馬融) 및 [[왕숙]](王肅)은 모두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홍범>편의 견해로부터 보면, 왕숙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 >조모가 질문을 했다. > >“공자는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크므로 요는 하늘을 법으로 삼았다고 했소.[* 《논어》(論語) <태백>(泰伯)] 요의 위대함은 하늘의 위대함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아 그것에 의지한 것이며,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지고함과 차이가 있소. 지금 전적을 펼쳐 의미를 열어 성인의 덕을 밝히는데, 요의 성덕을 버리고 달리 미세한 점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어찌 작가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유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 >“신은 스승의 견해를 받아 따르고 있으므로 아직 상서의 대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설의 좋은 점을 선택하는 것도 폐하께서 결정하십시오.” >---- >《위서》 <고귀향공>기 감로 원년(256년) 4월 10일 기사 중에서 당시 사마씨는 이전 [[조상(삼국지)|조상]] 정권의 중추인 [[하안]], [[하후현]]이 주도하던 [[현학]]의 반대 급부로 사마소의 장인 [[왕숙]]의 이론을 밀어주고 있었는데 조모는 특유의 식견으로 명색이 박사라는 사람을 데꿀멍시키고 왕숙의 이론을 대놓고 공격했다. 이는 자신의 명민함을 보임과 동시에 사마씨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기 충분한 발언이다. 참고로 이때 조모의 나이 불과 16세, 과연 그 학문의 수준이 조위 황가의 최고 준걸이라 여겨졌던 진사왕 [[조식(삼국지)|조식]]과 같다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게 아닌 것이다. 조모는 조식과 닮았다는 평가대로 시문학도 좋아했는데,[* 사실 조식만 아니라 조씨 일가들이 상당수가 시 매니아들이였다. 황실의 시조 [[조조]]부터 대단한 시인이였고 [[조비]]도 인성으로는 까이지만 시인으로는 중국사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기도 하고 조예와 [[조곤]], [[조터]]([[조휴]]의 증손자) 등도 있다. 집안 내력에 시인 유전자라도 있는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시를 짓도록 명하기도 했다. 시중 화유(和逌)와 [[진건]] 등은 시를 짓는 제한된 시간을 초과하여 파면될 뻔 하기도 했다. 조모는 항상 중호군(中護軍) [[사마망]], 시중(市中) [[왕침]], 산기상시(散騎常侍) [[배수(삼국지)|배수]](裴秀), 황문시랑(黃門侍郞) [[종회]] 등과 동어전(東御殿)에서 모여 토론을 하고 문학론을 썼다. 4명을 총애해 배수를 유림장인(儒林丈人), 왕침을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칭하고, 사마망과 종회에게도 각기 이름을 짓도록 했다. 조모는 성격이 급했으므로 이들을 소집시킬 때에는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배수 등은 궁 안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즉각 올 수 있었지만 사마망은 외부에서 근무했으므로 특별히 추봉거(追鋒車)[* 빠른 가마]와 근위대 병졸 5명을 내려 모임이 있으면 거마를 타고 빨리 도착하도록 했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조모는 다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급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결국 이로 인해 화를 입었다. 《북당서초》(北堂書鈔) 117권에 조모가 지었다는 언시(言詩)가 전한다. >혁혁하게 동쪽 벌하고, 아득하게 먼 원정, 배를 물에 띄워 만척이니, 주둔하여 지키는건 천개의 영채. >赫赫東伐, 悠悠远征, 泛舟萬艘,屯卫千營 아마도 수춘삼반 때 지은 시인듯. [[태평어람]] 351권에도 하나 전한다. >창과 방패를 따라 휩쓸고, 기마부대는 나란히 안항[*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조금씩 비껴 뒤쳐져 가는 일.]하는구나 >干戈随風靡,武騎齊雁行 256년 4월 [[사마소]]에게 [[제왕]]의 상징인 [[곤룡포]], [[면류관]], 붉은 신발을 하사하고, 8월에는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했으며 입궁할 때 이름을 아뢰지 않아도 되는 특권과 황금 도끼(鉞)를 내렸다. 258년 2월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 사마소를 5월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구석]](九錫)의 예를 더했다. 이에 사마소는 9차례 사양했으며 결국 받지 않았다. 259년 정월 [[황룡]] 2마리가 [[영릉]]현(寧陵縣)의 [[우물]] 속에서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길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모는 [[용]]이란 [[군주]]의 덕을 상징하며 올라가 [[하늘]]에 안주하지도 않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밭]]에 안주하지 않으며 자주 [[우물]] 속에 숨어있는 것은 길조가 아니라[* 《주역》의 <건괘>(乾卦)를 보면 '잠룡물용 현룡재전 비룡재천'(潛龍勿用 見龍在田 飛龍在天)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재전'이란 말과 '재천'이란 말은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고 생각하고는 <잠룡>(潛龍)이란 [[시]]를 지어 사마씨 정권의 국정 농단을 직접 [[풍자]]했다. 이에 [[사마소]]는 이 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잠룡>시의 자세한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아래에 있는 시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잠룡>시로 조모가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傷哉龍受困(상재룡인곤) : 슬프구나, 용이 곤경에 빠져 >不能躍深淵(불능약심연) : 능히 깊은 연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구나 >上不飛天漢(상불비천한) : 위로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下不見於田(하불견어전) : 아래로는 밭에서 일어서지 못하구나 >蟠居於井底(반거어정저) : 우물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鰍鱔舞其前(추선무기전) :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그 앞에서 날뛰는구나 >藏牙伏爪甲(장아복조갑) :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긴 모습이 >嗟我亦同然(차아역동연) : 아, 내 신세와 어찌 그리 같단 말인가 [* 권중달 교수 번역 《자치통감》 버전은 다음과 같다. "가련한 용이 외롭고 찬 곳에 쳐 박혀 있구나/깊은 물속을 뛰쳐나오지 못하여/위로 구천(九天)까지 날 수 없고/아래로 떨어져 내려와 농사짓는 밭에도 있을 수 없구나/가련한 용이 우물 밑 깊은 곳에 떨어져 있느니/흙 속의 미꾸라지가 눈 앞에서 춤을 추는구나/용이 이빨과 손톱을 숨기고 탄식하고 있으니/나도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로다."]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는 자기를 미꾸라지와 뱀장어로 비판해서 불쾌해했고 이 일로 대놓고 조모를 조롱하며 도발한다. 이런 식으로 [[사마소]]와 조모는 물밑으로 굉장히 신경전을 벌였다. 위에서 언급한 태학 행차 사건도 그렇고 사마소는 입조불추, 알천불명, 검리상전, 곤룡포, 면류관, 진공 등 각종 소위 [[황제]]가 내리는 물건이나 특권을 거절하는데, 아무리 사마소의 권력이 황제나 다름없는 위상이었고 [[고평릉 사변]] 이후 위나라는 조씨의 나라가 아닌 사마씨의 나라가 되었는데도 역시 아직 찬탈 지망생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진공의 [[작위]]와 [[구석]]의 예를 받기엔 그 공로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진공의 [[작위]]라는건 단순히 공의 작위를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옛 진(晉)나라의 영역을 떼어서 분봉하여 독립된 [[공국]]을 세우고 이 공국이 [[황제]]의 주위를 [[제후]]로서 보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인데, [[조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으로 제위를 찬탈하기 위한 첫걸음이나 다름없었어도 명분이 없으면 결국 주변 어그로나 끌다가 우후죽순 토벌 지망생들을 불러모으게 되는 것이다. 후대 [[북위]]의 이주씨가 이런 함정에 걸려 멸문지화를 입었는데, 사마소는 조모의 고단수 술수를 간파하여 이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존심을 누르고 훗날을 도모하고자 사마소에게 증조 할아버지 조조가 누렸던 지위를 줘서 사마소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려 했던 조모나, 이것을 간파하고 받지 않은 사마소나 모두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조씨가 조위를 세울 때는 한나라 황실의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다는 이른바 '협천자' 논리로서 주변 군벌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한황실의 권위를 세우고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그 명분으로 선양을 받는데 끝내 성공했었다.[* 물론 조조 생전에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했는데다가 원소, 유비라는 희대의 라이벌들이 '조조는 오히려 한황실을 겁박하는 역적' 프레임을 짠 덕에 반 조조 세력이 이를 근거로 조조에게 반항할 명분을 만드는데 성공했기에 조조는 끝내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기에 조조 스스로도 위공, 위왕에 올라 한 황실의 권위를 위협하고 수많은 황족들과 한실의 충신들을 죽였으며 [[순욱]] 등의 친 황실 세력을 숙청하는 등 협천자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었고 그것이 결국 조조의 한계를 만들어버렸다. 유비의 한중왕 선언이 크게 약빨을 받은 것도 이런 정황에서였다.] 반면 사마씨는 오히려 위나라 황실의 친위 세력을 철저히 말살했으며, 그나마 공로가 큰 조정의 원로였던 [[사마의]]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는 그 권력을 물려만 받았지 큰 공로가 없었으므로 딱히 위 황실을 겁박해 제위를 찬탈할 다른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사마소는 한술 더 떠 아버지 사마의나 적극적인 찬탈자였던 형 사마사만큼의 공적도 세운 바가 없었다. 조조는 천하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한황실을 안정시켰다는 협천자 논리라도 있었지 사마소는 아버지와 형의 권력만 물러받았을 뿐이었고 이전에 동흥 전투에서 자신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원을 화내면서 죽일 정도로 한 게 없었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강유의 촉한 등이 계속 공격해와 옹주가 흔들리고, [[제갈탄]]이 일으킨 수춘의 반 사마씨 반란은 오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무려 2년간이나 활개를 쳤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소가 섣불리 진공을 받기엔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가 행한 건 결국에는 현상 유지였다. 위나라 국내의 각종 반란[* 당장 [[공손연]], [[관구검]], [[제갈탄]]의 난 등등,특히 제갈탄의 난은 사마소의 진공, 상국, 구석 떡밥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진압이나 [[제갈량]], [[강유]]의 북벌 방어에 공을 세웠다지만 그걸로 조위를 국난에서 구했다거나 획기적인 국가 발전을 행했다고 볼 순 없었다. 조조는 어쨌든 동한 말기 막장이었던 사태를 수습하고, 환령(환제와 영제) 이래 동한의 암덩어리였던 환관과 외척 집단 일소를 완성하여 광무제가 육성해놓았던 사인층의 염원을 실현한 바 있었다.[* 물론 조위도 건국 과정이 그렇게까지 떳떳한 정권은 아니었다. 서진의 무리한 등장은 애초에 동한 조정을 온갖 술수로 무력화하다가 탈취한 조위의 등장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마의, 사마사가 아무리 대단했다고 해도 결국은 조조가 깔아놓았던 레일을 고쳐놓았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사마소가 그 상황에서 과거 위공 조조의 위상에 걸맞는 자리에 있었다곤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이 반란을 일으킨 동기가 바로 사마씨의 전횡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걸로 전공을 받기엔 문제가 좀 많았다. 게다가 그걸 차치하더라도 [[사마의]]의 경우는 본인이 일선 사령관으로 몸소 뛰었다는 당대의 언터쳐블한 공로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위나라에 훨씬 공이 큰 아버지 사마의도 승상, 구석을 거부한 마당에 공이 그것보다는 떨어지는 [[사마소]] 자신이 타당한 이유 없이 그보다 높은 상국이 될 수는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 타당성 있다. 그러나 이는 진공의 작위와 구석을 거부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아예 구석을 거절하는 척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망가뜨려버리는 행위기도 했다. 실제로는 [[사마소]] 자신이 황제라고 봐야 할 정도로 조정을 농단하고 장악한 주제에 정작 (형식적이지만) 구석과 진공을 받아 위 황실을 보위하라는 명령은 계속 거부하는 행태가 되는 것이다. 처음이야 정중한 양보로 볼 수 있으되 이게 두 번 세 번 네 번 이어지게 되면 조모만 실권 없고 모양새 빠지는 황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조모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었던 건 이해할 만하다. 한편 [[사마소]] 입장에서도 조모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사마씨는 일단 [[조방]] 자체가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도 모르는 핏줄이었으므로 조방이 반항하자마자 바로 폐위해버리고 적당히 어리숙하고 말 잘듣는 황족을 올린 다음 선양의 명분을 얻을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방에게 선양을 받는다면 조방의 핏줄 문제로 정통성 논란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헌제가 반항을 시도해도 헌제가 영제의 진짜 아들로서 황제위에 올랐고 협천자를 중요한 프레임으로 써먹었기에 참아준 조조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 결과론일지 모르지만 [[조방]]을 갈아치운 것이 [[사마사]]의 유일한 성급한 결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조처럼 헌제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방의 날개를 꺾고 더 고립시키는 것이 사마사가 의외로 성깔있는 조모를 옹립한 것보다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사마사가 조방을 내친 이유는 조방이 아무리 정통성 논란이 있어도 명제 조예가 유언을 남기면서 아버지 사마의를 고명대신 중 하나로 지명했고, 이로 인해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쿠데타]]를 일으켰어도 조방을 내쫓지 않고 황제 자리를 넘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아들인 [[사마사|본인]]을 내치려고 시도한 것이 괘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인보다 다소 어수룩하고 덜 냉철한 [[사마소]]와 조모가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든 요소를 제공하였고, 결국에는 사마소가 조모를 시해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씨는 끊임없이 약한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지니게 되었고, 결국에는 명제 조예 사후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무제 사마염 사후의 진나라 황제들은 내내 신하들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사마소]]가 조모를 시해한 사건으로 인해 '위나라 황실을 겁박하는 사마씨' 프레임은 더욱 강화되긴 했지만. 하여간 적당한 시기가 되고 사마씨에게 명분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이런 바지사장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게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조모는 그렇게 놔두기엔 무척이나 영민했고 조씨 황가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반항을 시도했다. 오히려 과거 조조가 받았던 특별대우를 조모 쪽에서 먼저 제의했을 때 사마소가 대단히 긴장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마소 입장에선 후일의 조환처럼 그냥 되는대로 말 잘듣는 황제였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가 않았으니 문제였던 것. 이러한 갈등은 조모와 사마소에게 끝내 최악의 결과를 낳고야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