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모(삼국지) (문단 편집) === 사후 === 시해 다음날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소]], 태위 [[고유(삼국지)|고유]], 사도 [[정충#s-2]] 등이 [[상소]]를 올려[* 대략 상소 내용은 조모가 한 짓은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멸망했으므로 창읍왕의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곽태후의 자애로움을 생각하면 왕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상소했다.] [[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조모는 [[낙양]] 서북쪽 30리에 있는 낙수(落水)의 지류에 안장되었는데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깃발도 없었다. 이에 [[백성]]들은 울면서 "이 분은 전에 [[시해]]당한 [[천자]]이시다."라면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사마소]]는 조모를 직접 시해한 [[성쉬]]와 [[성제(삼국지)|성제]] 형제를 처형했다. [[사마소]]는 여기에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나는 황태후를 보호하고 고귀향공에게 죽을 각오로 천자의 몸에 손 대지 말라고 했는데 성제 이 흉악무도한 역적이 제멋대로 천자를 시해한 것이다]]!"라고 변명을 했으나 애당초 [[가충]]의 발언이 있는데 이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사실 이후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사마소는 진짜로 조모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상식적으로 벌건 대낮에 황제를 죽였다간 명분에 얼마나 손해가 되는지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특히 사마소는 그 사마의의 아들이며 이전 행적을 봐도 결코 아버지랑 다른 바보가 아니다. 반면 가충의 경우에는 진짜로 제대로 생각을 안 한 것으로 보이고, 사마소의 진짜 문제는 그 가충을 감싸고 돌았다는 것이다.] 태부 [[사마부]]와 상서복사 [[진태]]는 조모의 시신을 무릎에 눕히고 곡을 했는데, 사마소가 진태에게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물으니 진태는 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사마소는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절충안을 물었으나, 진태는 타협을 거부했다.[* 《[[정사 삼국지]]》<삼소제기> 주석으로 인용된《위씨춘추》에 있는 내용인데, [[배송지]]는 이 일화에서 몇 가지 오류가 있는 점을 의심했다. 한편《[[세설신어]]》에서는《한진춘추》를 인용해 이 때 진태가 "그 이상이라면 모를까(= 사마소가 책임지든가), 그 이하의 방법은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적혀 있다.《자치통감》에도 진태가 "[[가충]]을 처벌해야 하며 그 차선책은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위의 [[충신]]인 [[진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말했으나 다르게 보면, 진태는 사마소에게 마지막 힌트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마소는 끝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진태에게 [[개소리]]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의 충신으로서 한 대답이든, 사마소를 생각해서 한 말이든 사마소는 진태의 말은 들었어야 했다. 만에 하나라도 진태가 사마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면 사마소의 정치적 안목에 실망하여 이미 결심한 [[자결]]을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진태가 사마소에게 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걸 직접 말한 부분에서 진태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다.] 사마소에게 밀고한 왕침과 왕업은 열후에 임명되었으며 왕침은 나중에《[[위서]]》[* 《[[정사 삼국지]]》의 <위서>와는 다른 책이다. [[진수]]가 이《위서》를 인용하여《정사 삼국지》<위서>를 만들었다.]를 만들었고 왕업은 훗날 [[서진]]의 중호군이 되었다. [[충신]] [[왕경(삼국지)|왕경]]은 오히려 조모를 부추긴 죄로 체포되어[* 《[[진서]]》<문제기>엔 대놓고 사마소한테 "불충해서 죽였다."고 한다. 황제보다 사마소에 대항하는 것이 더 불충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왕경이 모친에게 사죄했으나, 모친은 오히려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서진]]이 들어서자 무제 [[사마염]]이 왕경의 손자를 발탁한 것은 아이러니. 이후 사마소는 조조의 손자이자 [[조우(삼국지)|조우]]의 아들로 조모의 숙부뻘에 해당하는 조환을 옹립했다. 조모는 [[시호]]도 받지 못하고 폐제로 취급되었으며, 역사에서도 폐제 혹은 등극 전 작위인 고귀향공으로 불린다. 조모의 죽음은 사마씨에게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사마씨 정권이었는데 '''[[천자]]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참살당했다'''는 경악스러운 사태에 정권의 이미지나 도덕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망탁조의]]도 재위중인 황제를 백주대낮에 참살하지는 않았다'''.[* [[왕망]]은 [[평제]]를 독살했으나, [[유자영]]은 폐위시켜도 끝내 죽이지는 않았다.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킨 뒤에야 [[독살]]했고, [[조조]]조차 [[헌제]]에게 수차례의 친위쿠데타를 받았음에도 외척과 비빈들만 죽였을 뿐 [[헌제]]에겐 손대지 않았고, 인성을 의심받는 일화가 많은 [[조비]]도 선양받은 후에는 [[헌제]]에게 편안한 말년을 보장해 주었다. [[사마의]]도 [[고평릉 사변]]으로 [[조방]]을 [[바지사장]]으로만 만들었을 뿐 죽이진 않았으며 [[사마사]]도 [[조방]]을 폐위시켰을 뿐 죽이진 않았다.] 설령 황제를 죽이더라도 [[폐위]]하고 나서 정식 절차, 즉 [[황태후]] 혹은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라는 제대로 된 형태를 빌려서 죽이는 것과 폐위도 안 시키고 그냥 죽여버리는 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절차를 밟고 나면 더 이상 군신 간이 아니니 죄인을 처형하는 형태가 되지만, 절차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허울 뿐이라고 해도 '''조모는 천명을 받아 신하 사마소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간 세계 만물의 지배자'''인 것이다. 요즘 같아도 지도자가 마른 하늘에 암살당한다면 사회적 파란이 대단할 일인데,[* 때문에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아웅산 수치를 끌어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그런 [[군부]]조차도 ('''[[국부|건국의 아버지]]'''인 [[아웅 산]]의 딸인것도 이유겠지만) [[아웅 산 수 치]]를 구금하는 정도에 그쳤다.] 황제를 죽인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왕]]이나 [[황제]]는 [[천자|하늘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아 [[백성]]들을 보살피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질서의 최고 집행자였다. 그런데 그런 [[천자]]가 제위에서 물러나거나 폭정으로 천명을 잃은 것도 아닌데 감히 천명을 거스르고, 천자를, 그것도 하늘과 땅과 사람들이 똑똑히 보고 있는 도성 한복판에서 시해한다는 것은 곧 하늘과 사회 질서 전체를 개무시하겠다고 대놓고 천명하는 사건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천자 시해를 저지른 대역죄인에게 우선적으로 칼날이 들이밀어지고 천자의 시해를 시작으로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가 사회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번져나갈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되면 유교적 천명으로부터 비롯된 질서에 의존해 명령을 내리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 결국 백성들에게도 훨씬 더 큰 피해가 야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경계받는 행위인 것이며, 실제로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 세운 [[서진]]은 이후 천자의 권위가 개차반으로 떨어지면서 나라가 불안정해져 그로 인해 붕괴되었다. 이게 무려 사마염이 오나라까지 멸망시켜 후한의 멸망 이래 수십년간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했는데도 이 정도다. 물론 조모 이전의 중국 역사에서도 재위 중에 자기 [[신하]]에게 시해당한 [[황제]]가 없지는 않았다. [[이세황제]]는 자기를 옹립해준 환관 [[조고]]에게 시해당했고, [[의제(초)|의제]]도 자기를 옹립해준 서초패왕 [[항적]]에게 시해당했다.[* 그나마 진 이세황제와 초 의제 모두 칼에 찔려 죽지는 않았고, 형식상으로나마 자살하는 식으로 죽었다.] 조고와 항적 둘 다 [[망탁조의]]조차도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대역죄인]]으로 역사에 남아 비참하게 죽게 된다.[* 지금이야 항우를 상남자 취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원래 항우는 폭군의 대명사였고 역사책에 긍정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던 인물이다. 조고는 중국 역사 전체를 봐도 간신들 중 원톱으로 이름높은 인간이고. 그나마 항우는 초월적인 군사적 재능만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조고는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 놈들이나 하는 짓을 [[사마소]] 일당이, 그것도 천하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질렀으니 중국 대륙에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알 만하다. 후대에 중국사 최악의 역적 중 하나로 취급받는 [[주전충]]이나 [[원세개]]도 각각 [[당애종]]과 [[광서제]]를 독살로 몰래 죽였지 냅다 쳐죽이진 않았으니 [[사마소]]의 시군은 가히 중국사를 살펴봐도 전무후무한 사례였던 것이다. 조모 사후 결코 위나라의 충신이라고 볼 수 없는 사마씨의 원로 [[사마부]]가 조모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쇼를 한 다음, 그 다음날엔 "조모는 사악한 자이며 평민의 예로 장사 지내도 시원치 않다."고 폄하하는 앞뒤 안맞는 모습을 보이거나 사마씨 정권이 곽태후를 협박해 썼을 조서에서는 "조모가 황태후를 해치는 미친 짓을 하고 반역하여 선봉대가 처단했다. 옛 한나라 창읍왕처럼 평민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하면서도 정작 [[성제(삼국지)|성제]]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죽일 때는 '''황제를 시해한 흉악무도한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조모를 죽인 것을 '''황제 시해'''라고 단정하고 책임을 죄다 그에게 떠넘겨 죽이는 모순되는 장면도 보였다. 이는 당시 이 사태에서 사마씨 정권이 얼마나 당혹감과 혼란,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조모가 사마소에게 시해당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고, 그 전까지 사마씨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진태와 같은 이마저 사마씨에게 저항하게 만들었음에도, '''사마씨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회피하고 거부'''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사마씨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 지는 [[역적|불 보듯 뻔하다.]] 결국 단순히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는 명분으로만 사마씨가 새 나라를 세우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개국에 있어서 사마씨가 그나마 [[천하]]에 내세울 만한 위업으로 여겨질만 한 공이 절실해졌다. '''그것이 바로 이후에 벌어진 [[촉한멸망전|촉한 정벌]]'''이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후한이 위나라에 선양한 것이 조씨의 찬역이라며 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었고 자신들이 진정한 정통임을 자부한 세력인만큼, 이데올로기 적 측면에서 '''[[촉한정통론|조씨가 꺾지 못한 촉한을 실질적으로 사마씨가 정벌하여 진짜 천명을 받은 정통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것은 사마소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명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신하들이 반대할까봐 오로지 자기 뜻에 동의하는 종회와 함께 몰래 계획을 세우고 그걸 공표한 이후에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했으며 이에 이의를 가하는 자는 바로 죽여 본보기로 삼기까지 했으니, 당시 사마소가 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종회]]의 난 이후 촉한 정벌의 실질적인 최고 공로자인 [[등애]]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 알았음에도 역적으로 몰아 일족을 주살한 것도 그런 연유였을 것이다. '''촉한 정벌의 공은 오로지 그걸 주도한 최고 권력자 사마소만의 공이어야만 했을 테니까'''.[* [[배수(삼국지)|배수]]가 우공지역도 서문에서 말한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으로부터 시작하였다'''라는 말이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할 수 있는데, 즉 '''촉한 정벌의 공은 어디까지나 조씨가 아닌 사마씨의 공'''이라는 것. 그리고 사마소에게는 정말 고맙게도 등애는 촉한 정벌 과정과 후까지 합쳐 알아서 숙청당할 구실을 제공해줬다.] 실제로 사마소는 촉한 정벌 도중 승전보가 들려오자 그동안 고사하던 진공을 받았고, '''진공이 된 지 1년도 안 되어 촉한 정벌이 끝나자마자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진왕에 오르는 데 성공하면서''' 아들 [[사마염]]을 태자로 세웠고, 결국 아들의 대에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여담으로 중국에선《한진춘추》에 나오는 사마소가 조모 시해 후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한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기서 천하 사람이란 백성이 아니라 대귀족들이다. 사마씨도 귀족 세력이고 귀족들의 지지로 올라갔는데 황제를 살해한 일을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확신을 못하겠다."는 뜻이다. 이 해석이 정말로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대 중국인들이 사마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딱히 [[사마씨]]만 특이한 게 아니라 이게 전근대의 일반적인 사고관이다. 심지어 고대 [[아테네]]나 [[로마 공화국]]처럼 [[전제 군주제]]가 아닌 [[민주정]], [[공화정]] 체제에서조차도 [[아테네]] 시민권자, [[원로원]] 계급 같은 기득권 층과의 합의 없이 정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매우 난망한 일이었다.[* 괜히 [[원로원]]이라는 강고한 기득권 층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이를 정면으로 깡그리 박살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독재자]]라는 소리는 들어도 '''"시대의 풍운아요 걸물은 걸물이다."'''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사마소]]의 반응에 대해 중국인들이 "대귀족, 귀족 세력의 눈치를 봤다."고 굳이 말하는 것은 [[한나라]]에서 [[위진남북조시대]]로 넘어가면서 기득권 계층의 성격이 변화한 것에서 기인한다. 한나라 말기까지 최고 권력층이 눈치를 보는 계층은 [[향거리선제]]로 중앙에 진출한 [[호족]]들과 그를 뒷받침하는 지방의 향촌 세력이었다. 이러던 것이 위나라가 들어서며 향거리선제가 폐지되고 [[구품관인법]]이 시행되자 기득권 계층은 지방의 호족 세력에서 중앙의 [[문벌귀족]]으로 변화했으며 사마씨는 주대중정을 설치하는 등 구품관인법을 통해 기득권층의 문벌귀족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 황권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 가문이었다. 즉, '''[[사마소]]가 [[귀족]]들의 눈치를 본 것'''이라 해석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후대의 중국인들이 사마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조위정통론]]의 몰락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되는데 [[동진]] 시대에 이르자 [[환온|무장 출신 권신]]이 발호하게 되자 찬탈로 건국한 조위정통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조위나 서진이나 전부 찬탈로 건국했고 조씨의 탈법성이나 사마씨의 탈법성이나 그놈이 그놈이었기에 조위정통론을 긍정하면 동진 역시도 찬탈로 망하는 게 당연시되었고 때문에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을 끄집어내어 찬탈에 의한 명분을 부정하고 조위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조씨나 사마씨나 선양이라는 형식을 빌린 만큼 선양을 강조하였다면 사마씨가 선양이라도 해주지 않는 이상 환온이 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저 선양 과정에서 조씨는 황후를 죽이고 사마씨는 황제를 죽이는 막장 행보를 보인 탓에 도저히 선양의 명분을 살릴 수가 없었다. 선양을 옹호했다가는 환온이 너들도 했는데 나는 왜 못하냐며 사마씨를 향해 온갖 겁박을 하여 강제로 선양하게 만들면 그만이니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