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미수호통상조약 (문단 편집) == 배경 == 1860년,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한 후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했었고, 이에 따라 조선이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어야 세력 균형으로 조선이 안정된다고 봤다. 청나라는 1871년 [[일본]] 외무경(外務卿)이자 전권대사인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두 달여간의 논쟁끝에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폐지하고 일본과 대등하게 수교했고 일본과 조선의 수교를 반대치 않는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천황]], [[폐하]] 등의 문구를 문제 삼아 국서를 접수치 않았다. 결국 [[이홍장]]이 "우리는 괜찮으니 천황이니 폐하이니 하는 문구에 신경쓰지 말라"고 해서 조선도 더 이상의 명분을 내세울 수 없어 수교에 나섰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 후에도 외국과의 수교에 미온적이었다. 특히 강화도 조약 후 조선에는 척사파가 득세했는데, [[이홍장]]은 개인적으로 [[영의정]] 이유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을 움직여 서양과 수교시키려 했다. 구체적으로 1879년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미국]]과 [[영국]]은 무역이익을 추구하지만 [[러시아]]는 영토를 빼앗는다"며 "조선이 영미와 조약을 맺어 러시아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홍장은 청나라 내부에서도 자기 사람 [[정여창(군인)|정여창]]을 움직여 이러한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1879년 8월에는 총리기무아문[* [[외무부]]와 비슷하다]도 조정에 같은 내용을 주청하여 이것이 청나라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확정된다. 문제는 기존의 속방 조공-책봉 관계에서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므로 조선을 직접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는데 마침 이유원도 [[영의정]]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877년 [[박규수]]까지 사망해 개화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척사파들이 강해지는 상황이었다. 1881년 조선에서는 청나라 예부[* [[조선]]처럼 조공-책봉 관계의 속국 외교는 예부에서 담당했고, [[몽골]]과 [[티벳]] 등 간접통치는 이번원(理藩院), 서양등 외국 사절은 총리아문이 담당했다.]의 자문(咨文)[* 상국인 [[청]]의 예부와 주고받는 외교문서, [[황제]]와 조정에는 표문(表文) 황태자에겐 전문(箋文)은 정기적으로 의례적인 미사여구 곁들여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실무 문서는 자문을 보냈다.]을 받기 위해 영선사(領選使) [[김윤식(조선)|김윤식]]과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했는데 이때 [[이홍장]]이 왜 개항(강화도 조약) 후에 자강(自強)하지도 않고, [[서양]]과 수교를 미루는가 묻자 이들은 '''"이이제이와 같은 세력균형책은 청나라 같은 대국이나 가능하고, [[류큐국]]의 예처럼 조선같은 약소국은 오히려 화만 불러오며 늘 그래왔듯이 청나라에게 의존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수교문제는 조선은 서구 열강과 원한이 있어서 화해가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자 [[프랑스]], [[미국]] 같은 서구국가는 통상만을 요구하기에 별 문제없고, 다만 [[러시아]]가 위험한데 영흥만([[원산]]) 일대에서 러시아가 도발 할 경우 청나라는 조선을 도울 능력이 없으니 하루빨리 자강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으라고 종용한다. 러시아가 청나라의 연해주를 할양받으면서 [[두만강]]을 경계로 처음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했던 조선은 뒤늦게 국제 정세를 인식하고 이홍장의 요청으로 [[톈진]]에 대표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이리(伊犁)사태로 1881년 이리 조약을 체결해 또 다시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충돌하여 영토를 할양하고, [[2차 아편전쟁]] 당시 만주인의 발상지 동만주 지역을 뜯기는 등 반러감정이 매우 큰 상태였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홍집]]은 한 달 동안 도쿄에 머무르면서 일본이 권한 서양 외교관들의 방문은 거절하고 일본에 주재하던 청나라의 외교관을 찾아가 만났다. 이때 [[이홍장]]의 수하인 하여장(何如璋)과 [[황준헌]]을 만나 사흘밤을 세며 논쟁한 끝에 설복당한 김홍집이 대화한 바를 요약해 문서로 받은 게 바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다. 이 책은 [[러시아]]는 [[동양]]에 위협이 되니 러시아를 막기 위해선 조선이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속하고, 동양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홍장과 청나라의 구상과도 동일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1881년 5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영남만인소]]를 대표로 한 [[위정척사파]]의 반발에 부화뇌동하여 또 다시 [[http://sillok.history.go.kr/id/wza_11805015_002|척사 윤음을 반포]]하는 등 개항에 대해서 도대체 일관성이 없었다.''' 이는 1876년 위정척사파들이 왜양일체론을 내걸며 일본과의 수교조약을 반대했음에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을 개항이 아니라 기존 일본과의 교린관계 회복으로 명분으로 내세웠기에 이번에 다시 서양 열강과 수교하는 것에 또 다시 강력한 반발이 광범위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레이트 게임]]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청나라, 일본은 조선에 강력하게 구미열강과 수교를 요구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의 상태로는 자강의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홍장은 1880년 4월, 미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생각을 갖고 이를 위해 일본에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로버트 슈펠트(Robert Shufeldt, 1822~1895) 제독이 일본([[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의 생각을 알게 된 이홍장은 나가사키의 청나라 공사를 통해 슈펠트에게 청나라가 중재 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1880년 7월 슈펠트를 [[톈진]]으로 초청했다. 1881년 6월, 슈펠트는 미국 국무장관에게서 협상 전권을 위임받고 톈진으로 가 이홍장과 접견해 조선이 일본의 중재를 거부해 교섭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선과 미국의 수교가 시급하다는 것에 서로 동의한다. 이후 프랑스 유학파이자 동양인 최초로 바칼로이야 자격을 획득하고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Sciences Po)]]에서 국제법을 전공, 프랑스 변호사 자격증을 딴 마건충(馬建忠)이 조선과 미국이 맺을 조약의 내용을 작성했다. 1882년 5월 22일, 슈펠트와 마건충은 각자 군함을 몰고 [[제물포]][* 현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 [[동구(인천광역시)|동구]] [[화수동]]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현장으로 알려진 [[화도진지]]가 공원 형식으로 복원됐으며 누구나 무료관람할 수 있다. 이 공원 안에 [[조미수호통상 체결 기념비]]가 있다.]에 상륙했고, 조선은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군함 갑판 위에서 베이징에 있는 [[광서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올린 후 마건충이 번역한 한문본을 소개받고, 설명을 들은 후 서명한다. 이 과정에서 마건충은 청나라의 함선에서 조약을 조인하자고 했으나 슈펠트 제독은 제 3자인 청나라의 배 위에서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미국 함선에서 체결했다. 마건충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니 후견인으로 입회라도 해야한다 했으나 미국은 강력히 반대해 조선과 미국의 양자 체결 형식으로 체결했다. 조선과 이홍장은 조약 내용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삽입하려했으나 미국 측이 조선은 독립국이라며 이를 계속 거절해 회담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수교조약에서는 문구를 빼고, 대신 조선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별도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은 [[이홍장]]이 조선이 서구열강에게 수탈당하는 것은 청나라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관세 자주권을 첨부했고 이는 청나라나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에도 없는 꽤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조영, 조독 조약도 연이어 체결되었다. 참고로 일본이 관세와 치외법권 자주권을 되찾은 것은 [[청일전쟁]] 5년 후인 1899년 [[영일동맹]]을 앞뒀을 때였고, 20세기에야 각국으로 부터 비슷한 조건으로 되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