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병갑 (문단 편집) == 생애 == 철종 14년(1863년)에 관직에 올랐다. 그 후 고종 30년(1893년)에 [[전라도]] [[고부군|고부군수]]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늘 하던대로 각종 탐관오리 행적을 일삼았다. 그의 대표적인 [[악행]]으로는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만든 것으로 이미 상류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보[* 광산보, 혹은 민보라 불린다.]가 있음에도 더 큰 보를 만들겠답시고 백성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않고 부역에 동원하는가 하면 보가 완성되자 만석보의 물을 쓰는데 과도한 [[세금]]을 매겨 거액의 수세를 뜯어냈다.[* 현재 만석보가 있던 자리는 지방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거기 세워진 표지판에 '만석보지'라고 쓰여있다. [[유홍준]] 교수가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민간 차원으로 세웠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와 비교하며 자세히 논평하였다.] 또한 인근의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 비각을 세운다고 다시 세금을 뜯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이외에도 백성의 재산을 탐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뺏는 등의 각종 악행으로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거기에 만석보도 [[부실공사|잘못 만들었는지 홍수철마다 침수 피해가 발생해서 악명이 자자했다.]] 어느날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으로 2천냥을 걷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죽는 사태가 터지며 열받은 백성들이 폭발해 전봉준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동학농민운동]](1894년)의 시작인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미리 도망쳐서 린치는 피했지만 조정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금도]]로 [[유배]]당한다. 청일전쟁 직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이 설립한 친일내각은 조병갑을 석방했는데, 불행하게도 친일내각 붕괴 이후로도 조병갑은 고종으로부터 중용받아 1898년에는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