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보 (문단 편집) == 역사 == 조보에 대한 기록은 [[중종(조선)|중종]] 15년(1520년)의 것이 가장 오래되어 적어도 중종대부터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일각에서는 '[[세계 최초|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으로 규정하려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신문과는 그 성격상 괴리[* 신문은 대중성(publicity), 정기성(periodicity), 시의성(currentness), 범용성(universality)을 그 조건으로 가지나, 조보의 경우 대중성과 범용성에서 관보의 특성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민간에 보급되었기는 하지만 매우 기간이 짧았다.]가 있는데다 중국에서도 더 이른 시기에 관보가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언론사학계에서는 거의 인지되고 있지 않다. 매일 아침 [[승정원]]에서 제작, 배포되었으며 임금에게 올라간 상소문이나 조정의 인사이동, [[중국]]과 [[일본]]의 소식 등 다양한 기사들이 올라갔으며 매일 아침 이렇게 작성된 조보는 임금에서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볼 수 있었으며 조보의 내용을 베껴 쓴 [* 많은 양을 베껴 쓰느라 글씨를 빠르게 쓰게 되어 글씨를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관보]]는 고위 관료와 양반계층에 한해 배달이 되었다. 관보는 먼 지방에 있는 관료나 귀양 간 선비들에게도 일주일, 한 달치 등이 모아져서 전달되기도 했으며 중요한 정보전달매체였다. 조보는 초서체로 쓰였고 활판 인쇄도 되지 않다 보니 초서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선조(조선)|선조]]대인 1577년에 민간업자들이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민간 인쇄조보가 목판 인쇄되어 상업 발행되었다.(현재 남아있는 조보를 보면 목판만 쓰인것이 아니라, 금속활자로 인쇄된것으로 추측된다.) 사대부나 글 좀 아는 백성들 사이에서 가독성이 좋은 데다가 누구나 면포와 곡물을 낸다면 [* 당시에는 쌀이나 면포가 화폐의 역할을 했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선조가 인쇄조보의 발매가 민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국가기밀의 유출을 우려, 크게 분노하며[*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를 두고 선조가 졸렬하단 반응들이 나오는데, 원래 왕과 관료들 보라고 만든 관보라서 기밀정보들도 많이 실려있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kumi17cs1013&logNo=221648789218&referrerCode=0&searchKeyword=%EC%A1%B0%EB%B3%B4|조보(朝報)에 대해서 착각하는 점이 있는데.]]] 해당 민간업자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고 민간 인쇄조보 발행을 허가 낸 관료들도 좌천시키며, 민간에서의 신문제작은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율곡 이이]]가 윗대가리들은 죄다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하면서 아랫놈들만 고생한다고 대차게 깠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300년간 조선에서 민간인 대상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고, 1883년이 되어서야 [[한성순보]]가 나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