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봉암 (문단 편집) === 외국과 국내의 공산주의 활동 ===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하기도 했고 이어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면서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조봉암은 1922년 국내로 귀국하여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웨르흐네스크의 [[고려공산당]] 회의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해 다녔지만 2년간 수료하였으나, 폐[[결핵]]으로 관둬야 했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요양 후 복학을 권했지만 당시 치료약도 없던 폐결핵은 요양과 재발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중병이었다. 그 때문에 조봉암은 목숨을 걸고 국내로 귀국했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 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 1924년 6월 동지인 [[김조이]]와 [[결혼]]하였다.1924년 9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하였고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동시에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조봉암이 이런 일련의 일을 활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데는 [[고향]] 선배 [[김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김찬의 도움을 얻어 활동을 전개하면서 '박철환' 등의 [[가명]]을 사용했고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하였고, 1925년 5월 말쯤 도중에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서 4월에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었으므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야 하니 [[소련]] [[영사관]]에 [[여권]] 교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에게 여권을 받았다. 1925년, [[조봉암]]과 [[조동호]]는 조선공산당 밀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 조선공산당은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인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중국으로 도주한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였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다시 중국 [[상하이]]의 공동 조계에 가서 여운형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되는데 [[첫사랑]]이자 [[죽마고우]]였던 김이옥은 폐결핵에 걸리자 조봉암을 보고 죽어야겠다 싶어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보름 가까이 걸려 그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다. 조봉암은 이미 김조이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 때 김조이는 러시아에서 유학 중인 관계로 오래 헤어져 있었다.[* 김조이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유학을 떠났던 조봉암의 동생 [[조용암]]도 서신을 통해 조봉암을 비난했지만 동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김조이는 2살 연하인 동지 [[김복만]]과 [[재혼]]한다.]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봉암은 이때즘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에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동년 6월 경에는 [[중국]] 한구에서 개최된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또 1927년 11월에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회구현에서 개최된 전민족획일당조직총성회의에 참석하는 등 상해에서 활동한 좌익계의 청년들의 교양에 힘썼고 재중국한국인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하였고, 조봉암은 김이옥(1905~1933.10.26)과의 사이에서 장녀 조호정(1928.09.30~2022.10.26)을 낳았으나 김이옥은 결국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조봉암이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공금을 유용한 것과 공산주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치계에서 발목을 잡혔다. 특히 박헌영과 크게 대립했는데 공산주의 활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박헌영의 극심한 조봉암 공작은 광복 후 조봉암이 [[남조선로동당]]과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된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2년 투옥되어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7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끝내 손가락 마디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7416|#]]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하였으나,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이 죽었다. 1938년 출옥 후 [[인천광역시|인천]]으로 내려가 살면서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김조이도 1937년 출옥하였는데 김복만과 헤어진 상태였다.] 김조이의 친정 식구들이 [[창원시|창원]]에서 인천으로 이사오기도 한 것을 보면 이 때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공급하는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내던 중 1945년 1월 [[해외]]와 비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과거 [[이글루스]]에서 활동한 모 블로거는 1939~1945년 기간 동안 조봉암은 '변절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라는 등의 왜곡된 선동질을 했었는데 실제로 조봉암이 이 기간 동안 '유휴분자'라고 비난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게을리했다는 비판이지 [[친일]]은 아니었으며 1945년 1월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고 끌려가서 광복 때 풀려난 것을 감안하면 조봉암이 [[변절]]했다고 보기 어렵다.[[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61642|#]] [[일제강점기]] 내내 조봉암은 '특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있었다. 공동 조계에서 김이옥과 생활하던 때조차 품에 칼을 품고 잘 정도로 밀정에 쫓기는 신세였다.] 광복되던 날 일본 [[순사]]가 찾아와 조봉암과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서 다른 방에 2열로 앉혔는데 조봉암은 사형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순사가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윤봉림을 만났다.[* 당시 조봉암의 나이 50살이 가까웠는데 20대 초반 여성 윤봉림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둘 사이에서는 차녀 조임정(1947.04.25~), 삼녀 조의정(1950.08.26~)이 태어났다. 한편 유일한 아들인 조규호(1949.07.23~)는 청운각 송 마담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