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봉암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활동과 전향 === 1945년 [[8.15 광복]] 때 여운형이 치안권을 이양받아 정치범을 석방하면서 풀려났으며 여운형은 조봉암과 친한 사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옥할 때 마중나갔다고 한다. 이후 조봉암은 8월 18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조직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초 박헌영에게 비타협적으로 좌경화된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행태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조봉암의 입장이나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좌경화의 문제같은 것보다는 자신의 처우 문제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스크바 대학 유학파로 코민테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활동한 조봉암의 입지가 이 시기에는 엄청나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조봉암 변절 [[논란]]까지 나오는 것도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던 그 시기에 조봉암이 개인 생계 활동 이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광복 이후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 조봉암의 입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너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조봉암은 자신의 편지가 박헌영에게만 전달되기를 원했지 공개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6년 3월 소련과 연계 여부 등 공산당 활동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던 [[주한미군]] [[CIC#s-1]] 방첩대가 조봉암의 사무실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에 들어와 서류를 압수해갔는데 서류 중에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 초고가 있었고 [[미군정]]은 초고에 윤색을 보태서 [[언론]]에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안재홍]]이 비판 서한을 입수하여 한성일보에 보도했다고 하며 조봉암이 [[미군]]에 붙잡혔다가 석방된 이후로 [[좌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기도 했다. 서한을 계기로 조봉암의 이름이 [[우익]] 측에서 좌익 비판 용도로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그 결과 조봉암은 박헌영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고, 상술한 편지외에 좌우합작 노선의 당위성을 제기한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소책자에서도 박헌영과 남로당을 공개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국 조봉암은 1946년 5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1946년 6월 23일 조봉암은 좌익이 주최한 시민대회에서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배포한다. >현재 조선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으로 된 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으로써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 >----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 성명서''' 동아일보 1946년 6월 26일자 기사 中 당시 해방후 러시아 [[러시아 혁명|볼셰비키]] 혁명의 폭력성, [[이데올로기]] 과잉 및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는 일탈된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갈등을 많이 느끼며 전향을 한 좌익세력들이 많다. [[https://www.youtube.com/watch?v=ReM3yp8fiWg|KBS 역사스페셜]]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자 [[김규식]]을 찾아가서 동참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김규식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하여 참여가 무산되었으며 1948년에 열린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김구]]가 우익이었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과 달리 조봉암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인으로서 현실을 고려한 측면이 있었다. 1번 변절한 사람이 또 변절했다고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그나마 남았던 지지 기반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구의 경우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우익적 입장을 견지했다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김구를 지지했던 우익 쪽 지지가 떨어져 나가서 이승만에게로 갔다. 물론 [[3.15 부정선거]]가 있던 이승만보다 후대의 평가는 높아졌다.] 1947년 [[김약수]], [[안병무(1912)|안병무]]와 통일전선결성준비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1948년 [[북한]]과 사회주의 세력에게 변절자라고 욕을 먹어가면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5.10 총선거]]에 출마하였다.[* 이 때문에 남조선로동당에 의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서 [[선거]] 기간 중에 시골에 은거했다고 한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어찌 보면 변절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조봉암은 당시 [[김일성]]과 [[소련]]의 선거 거부로 한국의 남쪽 지역만의 단독 선거를 피할 방도가 없으니 출마를 해서 국회의원이 된 다음 평화 [[통일]]을 지향하고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인데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려 했던 것.][* 1946년 남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발 뒤 불법 단체로 지정되었고 스티코프의 비망록에 따르면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로동당원들은 소련 [[테렌티 시티코프]]의 자금과 명령을 받아 폭력적 사건 사고를 벌이면서 [[대구 10.1 사건]]을 선동하며 [[월북]]한 상태였다. 여운형 중심의 사회주의 계열 좌익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대화와 협력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였지만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흐지부지된다. [[소련군정]]은 민족주의 계열을 회유하려고 했으나 김구, 김규식을 중심의 민족주의 계열 우익은 출마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