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봉암 (문단 편집) === 두번의 대선 출마 === [[대한민국 국회]] 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이에 따라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으로 치러지게 되었는데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득표해 2위를 기록하였다. 1955년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조병옥]], [[신익희]] 등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했다. 반면 [[장택상]]이나 [[김성수(1891)|김성수]]는 공산당 결별 선언만 확실히 한다면 입당을 허락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민주당 주류에서도 마지못해 입당 허가를 고려하겠다고 했지만 얼마 뒤 김성수가 죽어버리면서 입당은 결국 무산되었다.[* 조봉암의 입당이 무산되자, 장택상은 민주당 참여를 거부하고 이승만 정권쪽으로 돌아간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보수적이고(우파적이라는 게 아니라 전통적이라는 의미의 보수) 통일 방안이지만 [[휴전]] 직후의 현실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국민 [[의료]] 보장, 무상 교육을 내세우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지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조봉암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290만여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배하였다.유효표 기준으로는 216만 4,000여표를 얻었는데 유효표 기준으로는 30%, 무효표까지 포함하면 23.9%의 지지율을 얻는다. 조봉암 측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는 것조차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정치깡패]]들의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사실 당시 민주당이 신익희 후보가 죽은 이후 조봉암을 지지했다면 조봉암은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느니 이승만이 3번 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서 '신익희 추모표'를 찍을 것을 독려했고 [[무효]]표만 185만여 표가 나왔다. 당시 이승만의 득표수가 약 504만여 표였고 조봉암의 득표수가 약 216만여 표였으니 민주당이 [[기권]] 투표를 유도하지만 않았으면 5:4로 싸워볼만한 형국이었다. 물론 신익희의 185만여 표가 고스란히 조봉암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동층이 있었겠지만 대략적인 형세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3080600209102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3-08-06&officeId=00020&pageNo=2&printNo=9297&publishType=00010|당시 선거 결과 #1]],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51800209201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5-18&officeId=00020&pageNo=1&printNo=10272&publishType=00020|당시 선거 결과 #2]][* 이 '신익희 추모표' [[떡밥]]은 훗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민주당의 선거 [[단일화]] 요구를 비판하는 근거로서 절찬리에 사용되고 있다.] 한편 조봉암의 선거 캠프에는 [[김성주]]도 참가했는데 좌익과 [[빨갱이]]는 [[사탄]]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백색테러]]를 일삼던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간부 출신이었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의 성향을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데 왜 이런 사람을 선거 캠프에 받아주느냐고 조봉암 선거 캠프 내에서도 의문이 많았는데 조봉암 본인이 정략적인 의도로 일부러 김성주의 참가를 허락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라고 하도 공격을 받다보니 그런 정치적 공격에 대한 [[방패]]로 삼고자 일부러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 김성주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성주 개인의 원한도 있었는데 원래 서북청년단 간부인 김성주는 한 때 이승만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점차 자신에게 맞서려고 하자 서북청년단을 재빨리 해체시켜 버렸고 이에 김성주는 이승만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1950년 10월경 6.25 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여 평양을 점령하자 김성주는 재빨리 유엔에 붙어서 유엔의 힘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이 평양에 보낸 관리들은 모두 김성주가 쫓아냈고 이승만이 평양에 가서 평양 시민들 앞에 연설을 하는 자리에 김성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승만이 몹시 분노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헌데 [[중공]]군이 쳐들어오면서 김성주는 몸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이미 이승만의 미움을 산 터라 처신이 몹시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이던 조봉암이 떠오르자 그에게 붙어서 이승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