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비 (문단 편집) == 기타 == 의서 외대비요에 조비의 어의가 조비의 탈모가 심해져 치료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대비요에는 그가 처방받은 탈모약의 재료와 정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있다.[* 40살에 죽은 이유가 이 합성 화학 약품의 독성 때문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문재가 뛰어나 아버지인 [[조조]], 아우인 [[조식(삼국지)|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라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 운문으론 연가행(燕歌行)을 포함한 [[시]]가 40수. [[건안칠자]] 등도 조비가 선정한 것이다. 문학을 애호하여 저술을 의무로 삼았으며 그 자신이 저술하여 지은 작품이 100여 편에 달했다고 한다. 진수도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다고 평가했으니 대단한 문장가였다. 저서로 열이전(列異傳) 3권과 문집 23권도 있었다 한다. 그 중 전론(典論)은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論文)이라고 평해지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가 된 책으로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논문 1편만이 전한다. >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논(論)을 읊었고, 자라서는 [[오경]](五經), 사부(四部)를 모두 겪었으며, 《[[사기(역사책)|사기]]》, 《[[한서]]》,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아니 본 것이 없었다. - 삼국지 위지 문제기 평왈 배송지주[[https://zh.wikisource.org/wiki/%E4%B8%89%E5%9C%8B%E5%BF%97/%E5%8D%B702|#]] 보기처럼 자아도취가 매우 심했다. 조비는 나름대로 공들 들인 글이라고 자신이 쓴 전론을 시와 함께 손권에게 전하고 또 편지 한통을 장소에게 썼다. 근데 이 기록은 위서 문제기 기록인데, 문제는 보낸 기록은 있는데 받은 기록은 오나라 기록에 없다. 그외 손권에게 코끼리나 보물 등을 받기도 했고, 향부자라는 약재를 손권에게 불로장수 하라고 보낸 적이 있는데 위나라 사신이 약재 이름을 까먹어서 향기가 나고 참새머리를 닮았다고 임기응변으로 작두향이라고 소개했고 향부자의 다른 이름이 작두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씨집안의 문학인 기질이 조롱받는 이야기가 꽤 많이 들리고 특히 자뻑이 넘쳐나는 조비가 많이 놀림감이 되지만, 그 중에서도 조비는 나름대로 진정으로 문(文) 그 자체를 사랑한 문학 성애자로서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공융]]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어쨌든 조조의 정적이고, 조조를 조롱하기 위해서라지만 결국 자기도 싸잡아 조롱한 바 있는 인물인데 뒷끝 쩌는 조조 시절 금기어였던 그 이름을 당당히 건안칠자의 첫머리로 세우고 산산히 흩어진 그의 글을 포상금까지 내걸며 모으려 한 것은 참으로 미담이다. 여기서 그 공융에 대한 평가가 재밌는데 일단 문체는 기품있고 현묘한 것이 옛 위대한 문인들인 [[반고]]/[[양웅]]에 비견할 만 하다고 추켜세우면서도 '그러나 논리 전개는 썩 좋지 못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지나치다'라고 지적하고 넘어간다. 공융이란 사람을 전반적으로 조명했을 때 평가 자체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바로 그의 조롱 대상이 되었던 인물로서 혹시 뭔가 꿍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까고 그 뒷끝을 감당할 일 없었던 철부지 조비로서는, 힘 없는 자의 무기로서의 조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이렇게 글 좋아하는 문성애자, 문제(文帝) 조비이지만 정작 제일 꺼렸던 동생 조식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글쟁이로 남았다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사실 전론을 비롯해 그의 문장은 아버지와 동생에 가려져서 그렇지 삼조의 일원인 만큼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남북조시대 유협이 쓴 문학비평서 문심조룡에서 조비와 조식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존의 설명들이 조비는 폄하하고 조식은 치켜 세운다며 조비의 경우 지위의 존귀함 때문에 그 재능을 깎아내리고 조식의 경우 그가 처한 곤궁한 입장 때문에 명성이 올랐다고 평했다. 기록에 의하면 [[알까기#s-1]]와 비슷한 놀이인 탄기(彈碁)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 탄기는 위대 궐내에서 화장품 상자를 사용한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문제(조비)는 특별히 이 놀이를 잘 했는데 수건 모서리로 바둑알을 튕기면 맞추지 못하는 게 없었다. (후략) [[태평어람]]에 기록된 [[https://ctext.org/text.pl?node=413091&if=en&show=parallel|조비의 조서]]를 보면 조비는 [[포도]]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조비는 포도를 찬양하면서 달콤하고 말랑거리고 상큼하며 맛은 최고에 즙이 많으며 걱정을 없애고 지루함을 풀어 주며 술로 빚으면 취하기도 좋고 깨기도 쉽다고 길게 늘어놓았다. 전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했던듯 한데 예문유취와 태평어람에 그런 조비의 어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기록을 보면 쓸데없을 정도로 음식 시식평에 열을 올렸는데 신하들에게 조(詔)하기도 했다. >오왕이 위 문제에게 귤을 바치니, 문제는 신하들에게 조(詔) 하기를 >남방에 귤이라는 과일이 있으나, 이가 갈라질 만큼 시고 단 것은 아주 가끔씩 밖에 없다. >위 문제 왈: >남쪽 나라의 용안, 여지(리치)가 어찌 서쪽 나라의 포도, 석청에 비하겠느냐? 시기만 할 뿐 중국(중원)의 대추만도 못하니, 안읍(대추 명산지)의 대추에는 비할 바도 아니다. >위 문제 왈: >진정군(眞定郡)의 배는 주먹 같이 크고 꿀과 같이 달콤하며 눈과 같이 아삭하니, 근심을 잊게 하고 갈증을 없애 준다. >위 문제가 신하들에게 조하기를 >신성 태수 [[맹달]]이 말하기를 촉의 가축은 맛이 진하지 않아 촉 사람들은 요리에 엿/꿀 등을 더해 맛을 낸다고 한다. 맹달 건도 생각해 보면 황당한 게 어쨌든 적국에서 전향해 온 사람이니 온갖 유용한 정보가 많을 터인데, 정작 황제인 조비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요리 얘기. 건조하게 써놓고 있지만 결국 '뭣? 촉 땅에선 무려 고기 요리도 단맛을 낸다고? 야 이거 완전 대박 아니냐? 우리도 한번 그렇게 해먹어 볼까?'하고 신하들한테 떠벌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덕분에 그저 매운 요리라는 인상만 뚜렷한 사천 요리[* 사천 요리 매운맛의 양대 축이 [[마라#s-5]|마와 라]]인데, '마'를 담당하는 [[화자오]]는 원산지가 다름 아닌 촉 지방이니 이 시대에도 향신료로 요긴하게 썼겠지만 '라' 부분을 맡는 [[고추]]는 미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이라, 이때는 우리가 아는 사천 요리식 매운맛을 낼 수 없었다.]가, 1800년전 촉에서는 요리에 주로 달콤한 재료를 쓴다는 사실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사실 꿀이나 엿으로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꿀]]은 서민들이 얻기 쉬운 감미료라 그렇다 쳐도 [[엿]]은 많은 곡물을 사용하여 엿기름을 고아 만드는 것[* [[조청]] 1kg을 얻으려면 쌀 2kg에 엿기름 500g을 때려부어 6시간 동안 삭히고, 그걸 또 한나절 꼬박 졸여야한다. 보다시피 쌀과 장작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에 수수조청 2kg 정도이면 가격이 10만 원은 가볍게 넘어간다. 고대에는 꿀이 오히려 흔했던 건 자연환경이 지금보다 오염이 덜해서 그만큼 벌들의 서식지도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다.]이기에 그만큼 시간과 품삯도 많이 들고 옛날엔 고급 식재료였다. 그런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촉이 부유하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아버지 때부터 활동했던 원로 중신 종요와의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70대를 넘긴 종요가 정실 손씨를 내치고 48살이나 어린 첩 장창포를 새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무선황후가 조비에게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권유해 조비도 종요에게 손씨와 다시 재결합하고 명을 내리나 종요가 자살시도를 하면서까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고금주에 따르면 조비가 황제위에 올랐을때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위나라 문제 때의 궁인들 중에서 매우 총애받은 자들로, [[막경수]], [[설야래]], 전상의(田尚衣), 단교소(段巧笑) 네 명이 있는데, 밤낮으로 문제의 곁에 있었다. 막경수는 선빈(蟬鬢)을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면 매미(날개)와 같았기에 선빈(蟬鬢)이라 하였다. 단교소는 처음으로 비단을 [[명주]] 신발에 입히고 자줏빛 분을 만들어 얼굴에 발랐으며, 전상의는 춤과 노래에 능했고, 설야래는 의상을 만드는 걸 잘했으니, 일세의 으뜸(冠絕)이었다. >---- >고금주 『잡주』 >위나라 문제는 궁인들로 하여금 백화계(百花髻)와 부용귀운계(芙蓉歸雲髻)를 하게 했다.[* 선빈이니, 백화계니 하는건 머리 모양이다.] >---- >중화고금주 >(대모자大帽子는) 본래 초야의 늙은이들이 쓰던 것이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입동]]에 귀천에 따지지 않고 통용해서 쓰게하니, 이것을 온모(溫帽)라 하였다. >---- >중화고금주 >잠방이(군褌)는 삼대(三代)에는 서술된 바가 보이지 않는다. 주나라 문왕이 만든 잠방이는 길이가 무릎까지였는데, 이를 폐의(弊衣)라고 했도 미천한 사람은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양의(良衣)라고도 했으며 대개는 양인(良人)의 옷이었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궁인들에게 비교당(緋交襠)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잠방이다. >---- >중화고금주 훗날 [[고평릉 사변|위나라의 실권을 찬탈하고]] [[서진|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보다도 8살 이상 적다. 사마의가 오랫동안 산 편이긴 하지만[* 오래 산 편이긴 하지만 90대 중반에 사망한 동생 사마부같은 사람도 있고 위나라 중신중에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활약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특출나게 오래 산 케이스는 아니다. 하지만 서기 2~3세기 무렵에 70대까지 살았으면 굉장히 오래 산 축에 속한다.] 죽은 나이로 따져도 조비의 사망 당시 나이는 사마의 사망 당시 나이의 절반에 불과했다. 아버지 조조와 마찬가지로 '''조비를 까는 야사들은 당대 혹은 가까운 후기인 [[육조시대]]에 이미 범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