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사(송) (문단 편집) == 상세 == 조사는 1084년에 검교태위, 집경군(集慶軍) 절도사로 제수되었고, 화국공(和國公)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형인 [[철종(송)|철종]]이 즉위한 뒤에는 작위가 보녕군왕(普寧郡王)이 되었으며, 1098년에는 간왕(簡王)으로 책봉되었다. 1099년에 철종의 유일한 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죽고, 1100년에는 철종마저 후사 없이 죽으면서, 북송 황실은 신종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발해야 했다. 철종이 사망한 11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신종의 남은 아들들은 조사를 비롯하여 신왕 [[조필(송)|조필]], 단왕(端王) 조길(趙佶), 신왕(莘王) 조우(趙俁), 목왕(睦王) 조시(趙偲)였다. 여기서 신왕 조필은 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재상 [[장돈]]이 내세운 인물이 바로 조사였다. 철종의 친동생인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사가 무리 없이 즉위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는 모두 신종의 아들들이니 차별을 받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주장하였다.[* 흠성헌숙황후가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신왕 조필 다음으로 장성한 면이 있겠지만 단왕 조길에 대한 흠성헌숙황후의 개인적인 총애도 한몫하였다. 게다가 흠성헌숙황후는 흠성황후(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한몫하였다.] 결국 흠성헌숙황후의 주장이 관철되어 조사는 제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단왕 조길이 즉위한 뒤, 조사는 채왕(蔡王)으로 다시 책봉된다. 조사는 휘종으로부터 제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휘종은 조사를 용서하였다. 조사는 이후 1106년에 사망하여, 태사(太師), 상서령(尚書令) 겸 중서령(中書令), 기주목(冀州牧), 한왕(韓王)으로 추증되었다가 초왕(楚王)으로 다시 추증되고 영헌(榮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83년 출생]][[분류:1106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