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사회 (문단 편집) === 농업 ===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등 해외 작물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 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1310821004100|#]]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대 후반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늘어 [[소작]]제가 일반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농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은 세금에다 소작료까지 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에 [[실학]] 같은 양민의 생활 형편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등장한다. 특히 [[정약용]], [[이익(실학자)|이익]], [[박지원(실학자)|박지원]],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등은 지주를 축소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토지를 지주로부터 농민에게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학은 조선에서 주류가 아니었고,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조선의 농업 생산성이 시간이 지나며 꾸준히 발전했을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최신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17세기 말에 정점을 찍었다가 구한 말 최저점을 찍을 때까지 꾸준히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81197/1/51-2_08_%EC%9D%B4%EC%98%81%ED%9B%88.pdf|#]] 조선의 농업생산성이 절정에 달했던 17세기 말에는 한 마지기에서 무려 40~50말을 수확했는데, 한 마지기가 한말의 씨를 뿌리는 넓이이니 쌀 한알을 심으면 50알을 수확했다는 의미가 된다. 영국은 산업혁명 직전의 농업혁명을 겪고도 1850년대에 한 알에 25알 정도 수확한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생산성이었다. 농업생산성 추계를 위해 지주 사족들이 마지기 당 얻은 지대를 통해 계산했는데, 17세기 말 이래로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며, 최악의 시기에는 한 마지기에서 10말도 수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후속 연구들도 최고점과 최저점의 시기나 생산성에 대한 계산이 다소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해도 조선 후기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는 것을 반박할 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계량적 역사연구는 한국사에서는 비교적 근래에 나타난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나, 조선 말기 일어난 농민들의 생활 수준 감소와 기근의 일상화, 잦은 농민 봉기 등 사회 붕괴 및 조선의 쇠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참고로 결국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지는건 '''[[8.15 광복]] 이후'''다. 북한에서는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해 버렸고, 이후엔 공산주의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협동 농장 또는 집단 농장의 형태로 바뀐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였던 남한에서는 지주로부터 농지를 구입한 뒤[* 신생 국가가 돈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유가 증권의 형태로 사들였다. 때문에 지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곧이어 일어난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력에서 자본가들에게 크게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는 21세기 들어 지방사회 소멸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다.] 농민에게 장기 분할 납부의 방식으로 팔아서 분배했다. '''거기다가 6.25 전쟁으로 지주고 뭐고 평등하게 박살나서 소작도 아작났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작]]은 불법이다. 그것도 그냥 불법도 아니고 [[헌법]]에 금지로 못 박아놨다. 어찌되었든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조선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건국 무렵 550만~7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9세기 말엽에는 약 1700만 명 정도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 가량 인구수가 폭증했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60_0040_0010_0050|조선시대 인구 변동]] 서기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 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쌀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