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한옥은 2층 건물이 없었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옥/장단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초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2층에서 잠자다가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http://luckcrow.egloos.com/2615456|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 그런데 [[소빙하기]] 이후 [[온돌]]이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 가옥보다 1층 가옥이 더 선호되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2층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 일부 사찰이나[*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아파트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uhamnu%2C_Changdeokgung_-_Seoul%2C_Korea.jpg|width=100%]] || || [[창덕궁 주합루]]의 모습. 원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나, 현재는 주로 건물 전체를 주합루로 부른다.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09047_STD.jpg|width=100%]] || || [[경상북도]] [[김천시]] 소재의 유형문화재인 방초정.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2층 구조다. || || [[파일:external/doopedia.co.kr/48570.jpg|width=100%]] || || [[덕수궁 석어당]]. 역시 2층. || || [[파일:external/www.subkorea.com/hgb015.jpg|width=100%]] || || 북한 종성읍성의 [[http://www.subkorea.com/xe/47452|수항루]]. ||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84723_STD.jpg|width=100%]] || || 백련사 [[http://blog.ohmynews.com/airunique/212611|만경루]]. 비탈길에 지어 앞에서 보면 2층 건물이란 게 보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WT.ac=community&GAL_IDX=101012000705937&mainType=imgslide&position=5&GAL_TYPE_CD=01&page=1&listStyle=&openYn=&ptm_idx=&ptm_cidx=|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가운데 길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0/Gyeongbokgung-HyangWonJeong-01.jpg/800px-Gyeongbokgung-HyangWonJeong-01.jpg|경복궁 향원정]], [[http://rja49.tistory.com/entry/%EA%B5%AC%EB%A1%80-%EC%9A%B4%EC%A1%B0%EB%A3%A8-%EA%B7%B8-%EA%B3%B3%EC%97%90%EC%84%9C-%EA%B9%A8%EB%8B%AC%EC%9D%8C%EC%9D%84-%EC%96%BB%EB%8B%A4|구례 운조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rumboy1016&logNo=8009525597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남산골 한옥마을]],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TcV&articleno=8761175&categoryId=117350®dt=20101204005316#ajax_history_home|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 [[http://younghwan12.tistory.com/1834|용주사 천보루]],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XwZN&articleno=5460|의성김씨 서지재사]], [[http://luckcrow.egloos.com/2559011|그 외 17세기 다층 한옥 관련 포스팅]]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태종(조선)|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라고 한다.]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글루스의 [[http://luckcrow.egloos.com/2541851|관련 글]] 참조. 즉, 이러한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사실로서 특히 "주거식 한옥"에 한하여서만 해당되는 내용이다. 흔히 알듯이 조선 후기, [[온돌]]의 대중화가 진행되며 비싼 가격 + 구조적 불안감[* 온돌은 목조 건축물 특성상 다층 건물을 짓기가 어려운데, 그 어려운 난이도를 온돌을 깔아 지반이 약해짐으로서 더 높여버리니 비용이 엄청나게 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존재 이유의 퇴색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2층 가옥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만 주거용으로서의 2층 건물은 그 역할이 퇴색된 반면, 주거 이외의 상업, 공업, 특수시설 등 다양한 용도로서 2층 건물은 버젓이 존재해왔다. || [[파일:DSC05875.jpg|width=100%]] || || 150년 전 지어진 [[이문설렁탕]]의 전신 '이문옥' || 어느 날부터인가 조선은 주거식 2층가옥이 없었다는 사실이 "조선에는 2층 건물이 없었다."로 그 개념이 확장되었고 옆의 링크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모든 2층 한옥이 역사왜곡(!)이라는 왜곡의 왜곡이 이루어지기도 한 것이다. 즉 모든 한옥이 2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주거지에 한해 사라진 것을 전체로 확장한 것에서 나온 오해이다. 결국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반도에도 복층 건물이 많았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여몽전쟁]] 전까지는 고려시대에 귀족 문화를 꽃피우면서 여러 화려한 누각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그림 또한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건물들이 버젓이 존재해왔었고 익히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 또한 남아있다. 전쟁 후 파괴된 건축물의 복원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당시 경제 상황이 몽골의 착취 + 전쟁 후유증이 극에 달해서 복원이 많이 힘들었다. 조선 초가 되어서나 국력을 회복하고 여러 누각이나 복층 건물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이 귀족 문화와 불교를 죄악시 해 백성을 힘들고 궁핍하게 한다고 인식하여 조선 이전에 파괴된 불교 사찰 건물을 복원하지 않았거니와 새로운 건물을 건축한다고 해도 높게 쌓지 않았고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오해인 게 현재는 사라진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을 보면 '''복층 구조의 건물들이 은근히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최소 수십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으며 [[http://luckcrow.egloos.com/2586612|서총대 1]] [[:http://luckcrow.egloos.com/2592554|서총대 2]]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 또한 굉장히 큰 크기를 자랑했다. [[http://luckcrow.egloos.com/2342317|흥천사 사리각 1]] [[http://luckcrow.egloos.com/2461500|흥천사 사리각 2]] 단지 이후에 복층 양식이 점차 사라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토가 파괴되면서 그 이전까지 남아있던 여러 고층 건축물들이 대부분 소실돼버렸고 무엇보다 [[경신대기근]]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이 거의 고갈되었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경우 이미 고려시대부터 목조 건축의 필수요소인 산림자원들의 고갈이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소빙하기]]로 평균 기온이 크게 낮아지자 [[온돌]]을 통해서 난방을 하기 위해 건물들을 단층으로 낮게 짓는 기조가 더욱 보편화되었고[* [[온돌]]을 까는 것이 그 당시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시 서양에서 쓰던 방법인 [[벽난로]]의 열 효율을 생각해보자.] 한반도 기후가 애초에 추워서 상징적인 건물이 아닌 이상 건물을 높게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서양도 [[백악관]]이나 [[다우닝 가 10번지]] 건물같은 관공서, [[티칼]]의 [[피라미드]] 사원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같은 종교시설 및 [[성(건축)|성]], [[궁전]] 등의 중요 시설들을 제외하면 전근대 시대 건물들 중에서 고층 건물은 그리 많지 않으며,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석탄]]이 난방용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조선]]과 같은 이유로 주거용 건물을 다층으로 짓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캐나다]]와 [[미국]]의 [[온대기후|온대우림]] 지대같은 우수한 목재 조달처가 있어서, [[아시아]]와는 달리 복층 양식이 얼추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