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조선에서는 한글을 천시했다? === [[세종(조선)|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훈민정음]])을 언문으로 부르며 천대했다는 오해가 있다. 일단 조선시대에 한글을 언문으로 호칭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의도적인 폄하, 천대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애초에 한글을 언문이라 표기한 것은 세종대왕 본인부터가 행한 것이다. 원래 언(諺)은 [[한문]](고문, 문어)과 대비되는 '구어'를 말한다. 즉 조선시대엔 기존의 한문을 [[문어체]]로, 한글을 [[구어체]]로 여긴 형태에 가깝다[*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현대 [[대만]]에서의 [[주음부호]]에 대한 인식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 문어체와 구어체의 구분은 현대에도 엄연히 존재하며, 당시 이것이 한글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로 이어졌는지는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반응이 어떻든 간에, [[조선]] 왕조에서 공식적으론 한글을 비하한다는 건 '''중대한 범죄'''였다. 엄연히 임금, 그것도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조선)|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한 문자이므로, 이를 비하하는 행위는 곧 조선 왕실 전체를 모욕하고 정통성을 훼손하는 행위와 같았다. 한 예로, [[연산군]]은 한글로 쓰여진 비방글이 발견되자 홧김에 사용을 금지하려 했으나 곧 유야무야 철회한 사례가 있다. 즉, 연산군과 같은 [[폭군]]조차도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가까운 것이 당시 한글의 위상이었다. 즉, [[한글]]을 쓰는 사람을 천대하는 건 몰라도, 한글 자체를 천대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한글 창제에 대해 일부 [[양반]]들이 반대했지만 그 입장이 조선 500년 동안 유지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양반들 스스로도 한글을 가끔 썼는데, 일반적으로는 [[한문]]을 모르거나 기초만 아는 평민[* 그러니까 [[과거 제도|과거 시험]] 급제자가 아닌 사람들을 말한다.]이나 [[노비]], [[천민]]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사용했다. 그밖에도 [[노걸대]]같은 [[외국어]] 학습교재나 [[해동제국기]]같은 [[언어학]] 연구서적에서 [[중국어]] 등의 외국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용도로 한글이 쓰이기도 했고[* 이건 심지어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에도 이런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평소 [[언어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세종대왕]]이 역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신숙주]]를 [[명나라]]로 파견해서, 당시의 [[중국어]]의 음운 체계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고는 그 결과를 [[한글]]로 기록해 정리했고 이것이 [[동국정운]]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명한 첫 구절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할 때 '듕귁'이 동국정운에 따라서 [[한자어]] [[중국]]을 표기한 것이다.], [[소학언해]]같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지은 교과서나 [[두시언해]]와 같이 민중들에 대한 계몽을 목적으로 한문으로 된 인문 고전이나 고전 시가들을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로 번역해놓은 것도 당대의 유학자들의 작품이다. 그 이외에도 [[훈몽자회]]같이 [[한글]] 자체를 연구하고 실생활에 맞게 정리한 서적도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등, [[양반]]들도 한글을 잘만 사용해왔다. 그러니 평상시에 본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글자를 고의로 천시할 리는 없는 것이다. 조정에서도 다양한 경전과 한문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조 교재나 한자 학습에 활용했다. 한글로 한자의 음을 표기하고 구결을 대체하게 했으며 성균관의 학생들도 경전의 한글 번역본을 보조 교재로 사용했다. 상급 기관에서 하급 기관으로 보내는 명령문인 '전령'의 경우에도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하는 내용이 있다면, 반드시 한글로도 공문을 작성해 한자 명령문과 함께 송달했다. 다만, 저런 오해가 널리 퍼진데는 당대에 실제로 있었던 [[한문]]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던 것의 영향이 있긴 했다. [[조선]] 시대에서의 한문의 위상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영어]]의 위상과 동일했다. [[대학(경전)|대학]]이나 [[논어]], [[맹자]] 등의 [[유교]] 경전들은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있었고, 당대의 중요한 공문서 역시 전부 한문으로 작성되었던데다, 그 이외에도 [[명나라]], [[청나라]]같은 [[중국]] 왕조들과의 교류를 위해 한문을 이용한 필담도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 해독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현대로 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서의 [[영어]] 영역 고득점을 위해 [[국어]] 영역 공부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정도로만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갖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당시에 중요도가 높은 [[한문]]이 특별히 더 우대된 것이지, 한글이 특별나게 천대받은 건 아니라는 얘기다. [* 동시대의 [[유럽]]에서도 같은 이유로 공문서나 학술 논문, 교양 서적 및 [[성경]] 집필을 죄다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로 했고, 자국어는 상대적으로 찬밥 취급이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조차도 초판은 [[영어]]판이 아니라 라틴어판이었을 정도고, [[영국인|자국인]]이 집필한 책을 한참 뒤에나 [[영국]]의 번역가들이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 집전을 [[라틴어]]로만 했던 것도 이런 역사의 흔적이다. 물론 유럽 사회에서도 민중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고 타지에서의 선교 활동에 사용할 목적으로, 가톨릭 [[신부(성직자)|신부]]나 [[수도자]]들 및 [[개신교]] [[목사]]들에 의해 성경을 활동지의 토착어로 번역하는 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때문에 많은 언어의 문증 가능한 가장 오래된 사료가 해당 언어로 번역된 성경인 경우가 적지않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국왕인 [[제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근대 영어]]로 번역된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이다.] 다만, 성균관 학생들이 어려운 한자 경전은 학습하지 않고, 알기 쉬운 한글 보조 교재만 읽고 경전의 내용을 암기하는 통에 조정에서 성균관 학생들의 경전 이해도를 문제 삼아 한글 번역본이 없는 경전을 성균관 시험에 출제하는 일도 발생하는 등, 한글이 한자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을지언정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사례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