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외부의 기록에 의한 잘못된 정보들 === 조선 시대의 생활상이나 문화생활 등,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외국인들의 기록들이 많이 인용된다. 이런 기록물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전해받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조선을 조사하면서 이들이 남긴 정보들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쓰여지는 자료들의 대부분이 "전문 민속학자의 조사기록"이나 조선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교류한 사람들이 아닌 "단순 여행객의 견문록" 혹은 그 자료를 모아서 작성한 수준으로 객관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자신들과 오래 교류한 일본 쪽 의견을 반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로인해 신분적, 시간적, 생활적, 문화적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만 기술하다보니 일부의 이야기가 전체로, 전체의 이야기가 일부로 변형되어지는 경우도 많으며, 다양한 양상들이 있음에도 한 두 가지의 정보만을 기술하여 정보의 다양성이 부족하다. 예로 윌리엄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조선 처럼 통신사에 대한 왜곡으로 인해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거나 부산이 대마도의 소유권이 있다는 잘못된 기록은 흔히 발견되며 [[한복의 양식]]과 관련되어 아래의 9번과 같은 입장이 대부분이지 다른 양식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약하다. 이러한 기술방식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문제들을 만들어냈는데,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이 이러한 정보들을 접하고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해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 항목에서 소개되어지는 대부분의 오해들이 외국인들의 견문록으로부터 생겨났고, 인터넷에 퍼져있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 정보들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좀 심하다는 것이다. >1. 왕궁은 작고 초라하다. >2. 공원도 여관도 없다.[* 중국, 서양, 일본에 비하면 초라할 순 있지만 [[주막]]같은 편의시설은 민간에서 많았다. 이를 국가적으로 보면 "객사"라고 하여 사신들을 위한 고급 숙박용 건축물들이 따로 존재했다. 물론 민간에까지 이러한 고급 숙박시설이 퍼지지 못함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3. 조선인들은 게으르다.[* 전근대적 농촌사회의 활동시간을 이해 못했던 결과. 실제로는 새벽부터 일하고 낮에 쉰다.] >4. 거리는 좁고 더럽다.[* 사실 이 말이 웃긴게, 어느 나라든 넓고 깨끗한 거리도 있는거고 좁고 더러운 거리도 있다. 현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오래된 도시일수록 더 낙후되기 쉽다.] >5. 땅바닥에서 잡동사니나 판다.[* 실제로는 건물장사, 바닥장사 모두 했다. 민족주의 때문인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기록에서는 건물장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바닥장사의 이야기들이 주로 적혀있다.] >6. 염색이나 무늬없이 흰 옷만 입는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리끼리한 흰색이 아니라 깨끗한 흰색이다. 즉, 당시로선 오히려 고급기술인 흰색 염료와 표백기술을 이용한 염색 옷이었다. [[백의민족]] 항목 참조.] >7. 여성들의 옷은 소년옷처럼 짧고 초라하며 노출하기가 일반적이다.[* 대다수의 기록에서 보여지는 정보 8번과 대조된다. 이 항목 때문에 당시 외국인들의 기록이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이는 반만 맞는 기록으로 어디까지나 [[케바케]]였다. [[한복/양식]] 문서를 보면 노출한 사람부터 똑바로 입은 사람까지, 짧은 옷부터 긴 옷까지 다양한 양식의 한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고, 노출도 평민들 입장에서는 큰 거리낌 없는 영역이었다.][* 조선 후기양식이 주이긴 하나 현대양식 또한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조선의 양식이 아닌 대한민국의 양식에 가까우며 실제로 거리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던 2차대전 후기 양식이다.] >8. 여인들은 온 몸을 두꺼운 옷들로 꽁꽁 싸매서 눈 외에는 아예 보이지도 않게끔 감추어야 된다. 때문에 외출도 할 수 없고 장옷으로 얼굴만 내밀고 다닌다.[* 7번과 대조되는 기록이다. 이 또한 반만 맞는 기록이다. 신분이 높거나 필요에 따른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몸을 꽁꽁 싸매어 감출 필요가 떨어졌으므로 장옷 없이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나가고 나아가 편하다는 이유로 가슴 가리개를 내려깐 채 외출하는 사람 또한 영상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9. 여성은 이름이 없다.[* 동양에서 이름은 윗사람이나 부를 수 있었고, 같은 위치의 사람들끼리 혹은 예의있게 부를 경우엔 별명이나 제2의 이름으로 불렀다. 즉 이름이 있어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남자는 따로 [[자]]를 붙혀도 여자는 자가 없어서 별명이 주로 쓰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10. 창고가 없어 식량을 저장하지 못해 썩기 전에 많이 먹어치운다.[*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오해를 가지고 기존의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면서 나온 말이다. 알다시피 장독에 보존식량들을 쟁여놓고 땅에 묻거나 뒷마당에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다.] >11. 조선인들은 양초를 먹기를 좋아한다.[* 중국인이 적은 기록인데 그 양초의 정체는 '''[[가래떡]]'''이다.] > ---- > 다양한 견문록에서 보여지는 과장과 오류들 이런 식으로 아예 틀렸거나, 반만 맞거나,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서 생겨난 오해들이 수두룩해서 100% 믿을 수 없는 것이 외국인들의 견문록이다. 당시 민족주의 등이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하였고, 동양의 문화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해 수박 겉핥기식 해석도 많고, 이들이 조사단처럼 다양한 정보들을 하나하나 다 정리하지도 않았었으니 이러한 오해들이 생겨나고 쌓여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기록들을 남긴 외국인들 중에는 조선에 잠깐 지나가는 정도이거나, 심지어는 아예 조선에 방문한 적도 없으면서 소문에 의존하여 적은 기록들도 꽤나 많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수의 해외인사들이 떠도는 이야기 혹은 일본에 머물며 들은 이야기들을 자신들이 직접 그 곳에 가서 몇 달 여행하고 겪은 이야기처럼 꾸며 기록하고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자기 공적을 띄우고자 여행의 고됨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등의 부풀리기까지 들어가다 보니 딱 봐도 조선에는 와 보지도 않은 티가 나는 기록도 부지기수다. 그만큼 이 기록들이 묘사하는 조선의 모습이 100% 사실이라 맹신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관찰이 아닌 조선에 대한 왜곡이 되어버린다. 열강 국민들에 의한 편견과 왜곡은 비단 조선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며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19세기 말의 영국 문인이었던 [[조지프 콘래드]]는 실제 콩고 식민지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각색해 저술한 소설 "[[어둠의 심연]]"에서 벨기에군 부사관 [[레옹 롬]](Léon Auguste Théophile Rom)을[* [[브뤼셀]]의 뒷골목에서 구르던 하층민이었던 롬은 본국에서는 상류층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콩고 자유국]]에서는 백인으로서 누리는 지위에 취해 스스로가 [[문명]]인임을 강조하며 귀족들처럼 회화를 그리거나, 자기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콩고에 대한 문화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떤 전문적 학위도 없는 식민지 방위군의 일개 부사관이었음에도 말이다. 롬의 저서에서는 흑인들이 "짐승"이며 "퇴폐적"이고 "시끄럽다"는 식의 서술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막상 그야말로 자기 관사의 꽃밭을 [[학살]]당한 21명의 흑인들의 두개골로 장식하는 등 온갖 야만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 유럽인들을 바탕으로 만든 [[커츠]]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들의 이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했다. 콘래드가 보았을 때, 유럽 문명의 첨병으로서 식민지와 '[[야만]]'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식민 개척의 환상에 빠진 한심한 인간들이거나 한몫 챙기겠다는 사업가, 한탕주의 사회부적응자, 기둥서방, 그리고 폭력적인 부사관 등의 [[인간 쓰레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문명'은 그 의미를 잃고 그들이 행하는 차별과 폭정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 ...사담을 나누는 가운데 알게 된 분명한 사실은, 내가 고위 인사의 부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능 있고 비범한 사람으로, 회사에서는 복덩어리 같은 존재로, 언제고 원할 때 쉽게 고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었네. '''맙소사! 한 푼짜리 경적이 달린 두 푼 반짜리 증기선을 모는 주제에!''' 그럼에도 나는 일꾼 중 한 사람으로 - 알잖은가, 하느님의 일꾼으로 말이야 - 여겨졌나 보더군. 빛의 사자나 하급 사도(使徒) 같은 존재 말이야. 그 당시에는 그런 '''헛소리'''가 지천으로 인쇄되고 회자되었는데, 그런 사기가 넘쳐흐르는 가운데 사시다 보니, 아주머니께서도 그만 정신을 빼앗기신 게지. '수백만의 무지몽매한 무리들이 끔찍한 관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정말이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네. > ------ > -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이석구 역, 을유문화사, 28p 콘래드는 이 유럽인 관료와 여행자들을 두고 '''"(가장 고귀한 문명의) 순례자"'''라며 반어적으로 비꼬거나 '''"종이로 만든 [[메피스토펠레스]](Papier-mâché Mephistopheles)"'''라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악마]]이며, '종이로 만들었다'는 말은 가짜라는 뜻이다. 종합하자면 '악마 행세를 하지만 그조차도 못 되는 잡놈' 정도의 욕설이 된다.] 대놓고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들 역시 현지의 "야만인"들 못지않은, 어쩌면 본인들은 그보다 더한 폭력성과 야만성을 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제국|제국]]이 부여한 몇 장의 문서와 우월한 과학기술 몇 가지만 믿고 식민지 주민들의 '미개함'을 지적한다. 그런 주제에, 이들은 머나먼 유럽 사회에 보내는 보고서와 서적들에서는 스스로를 숭고한 기독교와 유럽 문명의 전파자로 묘사한다. 이는 자신의 성과를 과도하게 부풀리곤 본국에 돌아간 후 한 자리 얻어내겠다는 심보에서 우러나는 일이었다. 콘래드는 이에 대해 "그 잘난 싸구려 [[증기선]] 모는 게 유럽에서는 고귀한 사명이랜다"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현지의 실상을 모르는 유럽 본토의 시민들은 이 왜곡된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그들을 칭송하며 온갖 지원을 보낸다. 콘래드가 까발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미개국'을 방문하고 탐험하며 기록을 남겼던 [[벨 에포크]] 시대 대부분의 열강 국민들의 현실이다. 그들의 여행기에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짙게 깔렸고,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에 대한 찬양과 비유럽권 국가들에 대한 비방이 그 위에 덧씌워져 있다. 이미 이 여행기들이 쓰이던 19세기 말에조차 이런 모순이 서서히 지적받고 있었다. 이미 백삼십 년 전, 직접 식민지 일선을 누비며 유럽인들의 민낯을 목도했던 콘래드는 탐험기와 여행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에 대해서 '현실을 모른다', '순진해 빠졌다'라는 식으로 이죽거렸다. 심지어 이렇게 유럽인들의 모순을 지적했던 콘래드의 작품들조차, 현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인종차별]]적이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콘래드조차도 이럴진대 그가 비판했던 당대의 다른 유럽인 여행자들이 남긴 기행문들을 그대로 신뢰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기록의 글쓴이와 주제들은 다양해서 이들의 기록이 무조건 부정적인 요소들만 있는 것이 아니나, 기존의 사실을 부풀려 과장하거나, 사실 속에 거짓을 숨기거나, 의도적이든 문화에 대한 무지였든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혹은 아예 악의를 품고 폄하하는 등 앞서 말한 요소들로 인해 일반인의 입장으로서 생겨나는 잘못된 정보들도 많으니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맹신하는 것은 금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