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남자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성이 먹었다? === [[외상#s-5|남녀가 따로 앉아 먹는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남자는 상•여자는 바닥에서 먹는다]]와 더불어 간혹 보여지는 조선시대의 식사문화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선 대표적으로 제이콥 로버트 무스의 기록이 있다. >부인은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 부엌에 서서 항상 남편이 부르면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다..... 남편이 식사를 끝내고 다시 소리를 쳐 여인네를 부르면 밥상을 가지고 나간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음식으로 부엌에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 >제이콥 로버트 무스<1900, 조선에 살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여러 문명권에선 내림상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B형간염]]에 대한 경각심이 뚜렷해진 지금에도 한국 식당에서 내림상 문화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파이(인터넷 방송인)/논란 및 사건 사고#s-1|여기]] 참조.] 각국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조선의 경우, 식사는 어느 정도 남기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 (손님[* 옛날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에겐 크게 대접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가족들의 한 끼 식사를 손님에게 먼저 제공한 뒤 남은 것을 가족들이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자세한 건 [[식사예절]]의 전통예절 참고]→웃어른→부모→자식)순서로 밥을 먹었다. 집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평민]]들은 특정 제재없이 남녀가 서로 겸상도 하고, 자식과 부모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여성은 남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섣부르고 과장된 판단이다. [[양반]]의 경우엔 [[식사 예절]] 참고.[*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선 목욕을 할 때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서 씻는 목욕문화가 있었다. 사족이지만 유럽 또한 중세 초·중기 때만 해도 남녀 관계는 아니더라도 연회 때 먹다 남은 것을 자리 뒤쪽에 앉아 있던 하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릇 또한 밀가루빵으로 만들어서 먹고 남은 빈 그릇은 그대로 하인들의 식사가 되거나 밖에서 잔반(...)을 기다리던 빈민들에게 주어졌다.] 여담으로 양반과 평민의 내림상의 성격이 다른 데 평민들이 한 번에 크게 뜨고 나눠 먹는다면, 양반들은 독상을 받고 남은 반찬을 아랫사람(웃어른→자식•손주들, 양반→솔거노비)에게 전달하는 성격이다. [[파일:조선 밥그릇1.jpg]] 조선시대의 밥그릇 사진을 보았다면 어마무시하게 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식사량의 증명과 동시에 내림상 문화의 산물이다. 수저는 따로 쓰더라도, 거대한 그릇에 가족들의 한끼 식사를 몽땅 떠놓아 각자의 순서에 맞추어 먹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남은 것이 아닌,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적절한 양을 떠먹는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조선에서는 음식은 남기는 것이 예의였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먹을 것이 생기기 때문. 이런 문화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이 [[제주특별자치도]]나 어항 주변 도시이다.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 먼저 일(뱃일)을 나가야하는 남자들이 서둘러 먹고 나가면 여성들[* [[성차별]]같은 게 아니라 어차피 뒤치다꺼리를 해야하니까,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더 늦게 먹을 수 밖에 없다.]이 남은 밥으로 식사를 하고 밭일을 나가는 것이다. 순서에 차별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식사법이 성리학을 통한 차별적 식사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비교적 성리학이 약하던 [[조선]] 전기에도 이러한 식사가 이루어졌었기 때문. 역으로 여성이 먼저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결혼식]]이다. 이 경우엔 신부와 신부의 가족들이 먼저 식사를 즐기고,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면 그 다음부터 남편과 하객들이 식사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