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백성들은 가혹하게 고통받았다? === 세도정치기와 구한말 시절이 워낙 개판이다 보니 좌우익을 막론하고 조선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파탄국가였다는 인식이 꽤 많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도정치로 나라가 미쳐돌아가던 조선 후기, 즉 [[순조]] 시절부터의 이야기지[* 그나마도 [[순조]] 시기는 나라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시기로[[https://web.archive.org/web/20231008051317/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lord2345&logNo=50189570255|#]], [[세도정치]]를 처음 시작한 [[김조순]]을 포함한 초기 세도정치의 주역들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애민주의적인 사람들이라서, 조정 차원에서 민란 진압 후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구휼책에 만전을 기울이거나, [[탐관오리]] 색출을 통한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은 [[철종]] 시기부터였다.], 초~중기의 조선은 건국 배경이 유교식 민본주의였기 때문에 나름 백성들을 최대한 안 괴롭히고자 한 편이다. 당장 조선의 세율은 동시대 중국, 일본보다 상당히 낮았고, 세입이 적다보니 조정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대신에[* 사실 어느 나라건, 전근대시대에는 통신 수단의 부재로 인해 행정력이 미비한 데다, [[조선]]이나 [[대영제국]], [[청나라]]같은 강대국조차 걸핏하면 대기근이 터져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는 바람에 그나마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본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큰 정부론이 득세하여 [[사회과학]]계의 주류가 된 것은 [[라디오]]나 [[TV]] 등의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정부가 강력한 행정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 20세기 중엽부터다. 비슷한 이유로 조선이 근대화를 시작할 때 고문들은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안되는 엘리트 관료들을 죽어라 굴렸다.[* 기본 세율이 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조선 후기로 가면 계속 내려간다. 물론 전세 말고도 이것저것 뜯어가는 것이 많았지만, 동 시대 일본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절반'''을 뜯기고 시작했기에 납세부담은 비교가 안 된다.][* 주요 논문들도 일본과 조선의 세금 제도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조선보단 일본의 세율이 더 과중했다는 의견들이 많다. 이런 논문들은 일본의 세율이 근대화에는 더 유리했던 거랑 별개로 농민들이 당장 먹고 살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나았던 시기들은 많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 덕분에 조선에는 일본의 [[마비키]]처럼 입을 줄이기 위해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는 풍습이 없었고, 심지어 서양인의 기록을 보면 [[산업 혁명]] 당시 [[유럽]]에서도 아이들을 버리는데, [[한국인|조선인]]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칭찬하기도 한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도 그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기도 했으며[* 고아원이라는 이명이 있는 오늘날의 [[보육원]]과는 달리, 이 당시에는 [[어린이집]]이나 [[탁아소]] 개념에 더 가까웠다.], 각 보육원들이 왕실에서 제공하는 복지 예산을 착복하기 위해 수용 가능한 인원 수를 넘겨서 아이들을 받았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강제노동 현장에 투입해서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다[* [[독일]]의 소설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나, 이를 원작으로 한 독일의 영화 감독인 [[톰 튀크베어]]의 동명의 영화에서 당시의 [[보육원]]들의 참상이 잘 묘사되었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의 학술적 기반을 마련했던 [[장 자크 루소]]조차도 자식들을 이런 보육원에 맡겨서 양육 문제를 방기했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을 만큼, 당대 유럽의 아동 인권 수준은 동 시대의 [[조선]]에 비해 딱히 나은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기근이나 재앙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조선]]에서도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기도 했지만[* 대기근의 경우,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유대인만 하더라도 구약성경에 서로의 자식을 잡아먹은 사건을 기록했다. 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의 경우 발생하는 영아유기 및 살해, 식인 등은 전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발생했다.], 일시적일 뿐 [[일본]]처럼 문화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하도 역사가 오래된 풍습이라 '''1930년''' [[금해금|쇼와 대공황]] 때조차 부모가 딸 아이 모두를 [[공창]]에 팔아 적십자 단체가 구조한 일도 있었다[* 영화 [[리하르트 조르게#s-8|스파이 조르게]]에서도 이 사건이 묘사된다.]. 왜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아동 유기나 인신매매가 하나의 풍습이 될 정도로 성행했느냐면, 조선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잘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막부]]에서 농민들을 위한 구휼 대책이나 복지 정책을 마련하려고 해도, 전국 각지가 독자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진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개인 영지로 나뉘어서, 정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못해 백성들의 기근이 만성화된 탓이 크다[* 19세기 말엽의 [[일본]]의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인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면 그 참상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남의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사위에게까지 개무시당할 정도로 철저하게 매장된 남자의 이야기에서, [[맬서스 트랩|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난을 겪는 것]]을 막고자 남자들의 결혼과 성생활을 제한한 탓에 마을 남자들이 [[성욕]] 해소를 위해 동네 [[개]]들을 상대로 [[수간]]을 일삼으며, [[고려장|일정한 나이가 된 부모를 산에 유기하는 등]]의 충격적인 묘사가 마구 나오는데, 당대 일본의 민중들의 삶을 고증한 부분이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불리는 [[텐메이 대기근]]의 수습이 대실패로 끝나고 되려 [[국가 막장 테크]]로 이어진 이유도, 지역 영주들에게로 권력이 분산되어 대책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없던 탓이 크다[* 이해가 안 된다면, 그놈의 [[연방제]]의 부작용 탓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대한 방역 정책이나 백신 접종 계획이 지지부진한 작금의 [[미국]]을 보면 쉽다.]. 이보다 한 세기 전에 [[조선]] 역시 [[한국사]]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공업이 발달하고 갖가지 실용적인 학문이 발전하여 중흥기를 맞는 계기로 작용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다. 조선은 전국의 모든 지방관을 조정에서 직접 임명할 정도로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고려시대]] 때까지도 조정이 보낸 지방관과는 별개로 [[탐라]]의 옛 군주들이 계속해서 군주위를 세습하면서 지방관들의 행정권에 지대하게 간섭했는데, [[조선시대]]로 넘어오자마자 군주들이 몽땅 폐위되고 직할통치가 실시되었다.], 유사시에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서 신속하게 필요한 대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영양 수준도 알고 보면 주변국들보다 더 좋은 편이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1310821004100|#]] 그 때문에 조선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던 사람들이 조선인들이 대식가였다는 주변 국가들과 기록에 의한 평가를 보고 벙찌기도 한다. 대식도 먹을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한민족의 식사량]] 참조. 형법도 가혹할 것 같지만 실제론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너그러운 편이다. 사극이야 뻑하면 역모 사건이 일어나서 비상시국 하에 두들겨 패는 것이고, 이마저도 온갖 엽기적인 형이 판쳤던 중, 근세 유럽의 마녀사냥 시절이나 전근대 중국, 일본의 기록과 비교하면 양반이었다.[* 전국 시대 3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대결하던 타 영주와 그 가족들을 법도 아니고 학살로 조지는 편이었으며 때에 따라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히데요시의 경우 자신의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이시카와 고에몬|그 도둑]]을 도둑의 10살 난 아들과 함께 [[팽형]]에 처하게도 했다.] [[일본 제국]]이 건국되고 [[메이지 유신]]이 된 후 8년이 지나서야 고문을 금지시켰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조차 재수없으면 잡혀가서 [[코렁탕|코로 미소국을 시식했다]].[[https://ja.wikipedia.org/wiki/%E6%8B%B7%E5%95%8F#%E8%BF%91%E4%BB%A3|#]] 또한 조선은 백성들을 위해서 [[신문고]]를 만들거나[* 물론 [[신문고]] 문서에도 있듯 신문고를 치는 데에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랐지만, 백성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나온다. 가장 좋은 예로 [[격쟁]]이 있다.], 농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 특히 농민들의 형편에 따라 지방관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평민들이 영주의 착취에 견디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키면 막부에서 영주에게 책임을 물어 영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조선에 비하면 규칙화가 덜 된 편이었다.] 장애인 등용, 사형에 대한 3심제 시행, 노비 학대에 대한 처벌 등 시스템이나 이념은 오히려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보다 나은 편이었다.[* 다만 이러한 시스템이나 이념도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에서 형성되고 운영되는 것이기에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미비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특정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전근대적인 시대 환경을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전근대에 피지배층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 사실은 잘 시행되든 안되든 세계사적으로 봐도 특이한 사항이다.] 문제는 후기에 가면 시스템의 운영이 점차 변질되고 [[삼정의 문란|삼정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민란을 가혹하게 진압하는 경향이 조금씩 생겨나긴 했지만, 이념과 현실의 괴리[* 원래 유교적 이상에 따르면 윗사람은 윗사람답게 인덕을 베풀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답게 순종하되 윗사람이 잘못하면 복종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인 이상체제다. 다만 이상이 현실에도 적용되었다고 보긴 힘들다.]가 문제였지,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기사(역사)|기사]] 작위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