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모든 계층에서 성리학적 예법과 사상을 따랐다? ===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강화되고 [[칠거지악]], [[출가외인]] 등 예적 제약이 형성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허나 위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주로 [[양반]]들에게 해당되던 내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인식은 '''"양반과 평민의 입장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다."''' 실제론 계층마다 제약의 종류와 수준이 달랐으며,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고위층은 강력한 규칙과 예가 있는 반면, 평민은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입장이었다. 흔히 조선여성의 권리를 낮게 만들었다고 하는 '''"남녀칠세부동석, 출가외인, 남존여비, 칠거지악, 지조와 절개, [[삼종지도]][*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충성하고 받든다는 사상.], 외출•노출 금지"''' 등은 민간이 아닌 '''"양반의 성리학"'''이었다. 평민•천민 계층에겐 그 관념이 없거나 미약하던, 귀족들의 예법과 정신적 가치였단 소리다. 이 외에도 부부유별, 신체발부수지부모[* 부모에게 받은 몸을 훼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상.]와 같은 사상들도 신분에 따라서 그 유무가 갈렸다. 물론 성리학을 기초로 한 조선시대 특성상 일반적인 백성들도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은 평민들에게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법이 적용되어, 성차별이 법적으로 명백하게 있었고, 서당의 보급과 함께 [[소학]]의 교육이 증가하며, 성리학의 예의범절이 전파되었기에, 여러 가지 성리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였다. 허나 위에서 서술했듯이, 각 계층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달랐던 만큼 그 형태와 깊이엔 차이가 있었다. 정말 양반과 동일한 수준의 성리학을 따랐다면, 철저히 몸을 감춰야하고, 방에 갇혀 남성을 멀리하며, 지조와 절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옷을 입은 듯 만 듯 밖에 돌아다니고, 음담패설과 성 관계 쪽에서 개방적이며,[* 민간에서는 기본이고 판소리, 탈춤 등 옛날 대사 속엔 생각보다 [[섹드립|수위높은 드립]]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이후에 양반층으로 넘어가면서 어느정도 순화되었지만, 민간에선 여전히 남녀노소 흔한 유희성 발언이었다.] 연애, 외출, 축제 등 남녀간의 접촉이 흔하게 일어났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쉽게 말해, [[유교]]란 거대한 틀 안에서 "직접적인 예법으로 이루어진 사대부의 성리학" 그리고 "간접적인 법률로 이루어진 민간의 성리학" 정도로 구분되었다고 보면 된다. 성리학적 입장을 제외하곤, 평민들의 차별은 주로 "남자는 힘, 여자는 섬세함" 정도였을 뿐, 뚜렷하게 구분된 경계는 없었다. [[전쟁]], [[스포츠]]처럼 힘을 중요시하는 것 외에 [[요리]][* 단순히 요리는 조리할 양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일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에 남성의 역할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허영만]]의 만화 [[식객(만화)|식객]]을 봤으면 알겠지만, [[숙수]]라 하여 [[조선]]시대에 남자 요리사들이 엄연히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령숙수]]라고 불리는 궁궐 수랏간의 주방장 직위도 있었는데, 현대로 치면 [[청와대]]의 주방장 정도로,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직위다.], [[꽃꽂이]], [[독서]], [[조각]], [[그림]], [[연주]], [[노래|노래와]] [[춤]] 등 웬만한 문화들을 서로가 공유하며 즐겼다. 나중엔 사대부와 같은 지배층들을 까는 문화가 생겨나고, 기존의 다 함께 노는 문화가 맞물리면서 더욱 활발해진다. 실제로 민간에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개념이 강해진 것은 20세기 즈음에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조선]]보단 [[대한민국]] 초창기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