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오해 (문단 편집) === 조선은 전적인 폐쇄 사회? === 조선에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했을 때는 조선 후기, [[척화비]] 세웠을 때에만 한정된다.[* 게다가 척화비가 세워질 때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1년도 안 되어 폐지된다.] 또한 해외와 무역을 많이 하지 않다 보니 조선이 해외와 무역이 거의 없었거나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삼국 시대, 통일 신라 및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만큼 해외와 개방적인 무역까진 아니었을 뿐[*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동아시아에서도 수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조선보다 더 많은 나라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동남아와 인도, 중앙 아시아, 유럽 지역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거리가 멀어서 무역을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경우 쌀, 목재, 향신료 등의 자원들을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한 적도 있었다. 물론 분명히 해외와의 무역이 다소 제한적이고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무역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류큐 왕국]]과도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으며, 류큐를 통해서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했다. 특히 명나라나 청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간혹 명나라, 청나라의 소수 민족들과도 무역을 한 적도 있었고 한어, 만주어와 더불어 몽골어 교과서도 있었다. 애초에 세계 경제의 핵심으로 수백 년 동안 군림한 명 · 청 왕조와 장기간에 걸쳐 교류한 조선을 보고 폐쇄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전세계에서 생산하는 은의 상당 부분을 먹어 치우고 인도와 더불어 세계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중국과 수백 년 동안 교류했으니 조선도 세계 경제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무역은 아니지만 [[얀 야너스 벨테브레]]의 경우처럼 총포 기술을 개량한 서양인도 있었다. 그 외 표류를 했거나 어쩌다가 조선에 잠시 들른 해외 외국인들, 일부 선교사들과의 밀무역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 건축 등 일부분 서양의 기술도 받아들이기도 했다. [[수원 화성]]만 해도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서양식 기술의 영향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그 외 조선 초기의 과학에서도 이슬람권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오히려 서구권과 교류하는데 조선보다 더 유리한 측면이 있던 [[중국]]이나 [[일본]]도 한때 [[쇄국정책]]을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시마바라의 난]]과 같은 자국 내 [[가톨릭]] 신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핑계삼아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 국가와 단교를 선언한 [[에도 막부]]의 사례가 있다.[* 물론 데지마 등 부분적인 교류는 있었으나 그 외의 구역들은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에도 이전 시대보다 폐쇄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 중국의 경우는 [[아편 전쟁]] 직전까지 [[광저우시|광저우]]와 [[마카오]] 두 곳을 통한 서구권과의 제한적인 무역만 행했던 [[청나라]]의 사례가 있다[* [[명나라]]도 [[쇄국정책]]을 한 바는 있지만, 이쪽은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해안가 지역이 초토화된 탓에 외국과의 제대로 된 해상 무역이 불가능했던 탓이 크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의 최우방국인 [[조선]]과의 조공무역조차 왜구 탓에 [[만주]]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해서 실시했을 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쪽은 본격적인 쇄국 정책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