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이관술 그룹 형성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재유체포.jpg|width=100%]]}}}||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재유이관술악수로이별.jpg|width=100%]]}}}||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 1936년 12월 25일에 이재유가 검거되고 이어서 김희성이 주도한 조직도 검거되어 경성의 양대 조직이 모두 와해되었다. 그 후 1937년에 이관술, 박진홍, 공성회, 김순진, 이순금, 안병춘, 김재선, 이성학, 남남덕, 조병목이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그룹은 2년 후인 1939년에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는 단초를 제공한 조직이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이관술 혼자만 지하운동하는 수배자이고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을 하면서 이면에서 운동을 모색하는 중이며, 비밀결사 특성상 같은 조직이라도 한데 모인 일은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봐야 아래가 이해된다. 그래서 박진홍 등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 중이니까 자주 접촉에 성공하는 것이고, 이관술은 따로 행동하는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진홍.jpg|width=100%]]}}}|| || '''[[박진홍(독립운동가)|박진홍]]''' || 1935년 1월 검거되어 1937년 5월 석방된 박진홍은 경찰 감시로 자유롭지 못한 와중에도 운동을 다시 하기 위해 공원회와 그의 동생 공성회, 김순진, 안병춘(안병춘은 경성트로이카 1기 최상부 트로이카. 이때는 딱히 수배자가 아니었고 합법 생활 중) 등과 만났다. 그런데 공원회는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진단하였으며, 안병춘은 이재유가 파벌일 뿐만 아니라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맞서 박진홍은 이재유를 옹호했다. 김경일 교수에 따르면 "그녀는 이 문제에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세 파악과 운동 방침의 수립을 위하여 그녀가 이관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한편 일제가 혈안이 되어 쫓는 수배자로 지하운동 중인 이관술은 1937년 6월 영등포에서 공장노동자 조직에 착수하였다. 1937년 7월 1일 박진홍은 이관술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는 한 운동자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음날 그의 안내로 상도동 부근에서 시장에 가는 상인풍으로 변장한 이관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번대방동, 신길동을 거쳐 시흥군의 신림리와 봉천리 사이를 원형으로 돌면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박진홍은 이관술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재유의 의발을 이어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확대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37년 7월 7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은 안병춘에게 이재유가 쓴 <자기비판문>과 운동자금을 주었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그 뒤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여의도 경성비행장 부근에서 접촉했는데 이 만남이 경찰에 발각되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관술출현설.png|width=100%]]}}}|| ||'''이재유 사건의 거두 이관술 출현설. <매일신보> 1937.7.23.[br]"이재유 이상의 역할을 한 이관술이가 시내에 잠복한 것을 알게 되어 경찰부와 부내각서에서는 이 문제의 인물 이관술을 체포하고자 혈안 수사를 하는 중이다."''' || 경찰은 이관술을 놓친 보복으로 뚜렷한 '범죄행위'도 없는 이순금을 9개월동안이나 가두었다. 이 때문에 박진홍 또한 다시 경찰에 취조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관술과 공원회의 만남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공원회가 안병춘과 연결되며 1937년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공원회와 안병춘은 이재유 그룹의 운동을 파벌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국제선과 연결된 정통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1937년 그룹에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후 1939년 경성콤그룹도 국제선의 후신을 자처하게 된다.] 체포되었던 박진홍은 9월 6일 기소중지로 석방되었다. 박진홍은 직후 9월 7일에 공원회를 방문했다. 박진홍은 공원회를 지도자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공원회는 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역량이 부족했다. 박진홍은 비합법 생활로 잠복할 것을 건의했지만 공원회가 만류했다. 그 후 박진홍은 인정식, 남남덕, 조병목 등 사람들과 제휴하며 운동을 모색하거나 운동자금을 마련을 위해 이순금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37년 10월 13일 박진홍과 공원회는 삼청공원에서 만났다가, 일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양성호와 마주쳤다. 둘은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잠적하기로 했는데, 직후 박진홍과 이순금이 경찰에 연행되어서, 이 운동이 중단되었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한편 이관술은 1937년 7월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반전반제적인 소그룹운동을 지도했다. 이관술은 1938년 이순금이 출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에서 접촉한 후 다시 대구로 갔다가, 1939년 1월 충주로 가서 김삼룡과 접촉한 뒤 경성으로 왔는데, 이때부터 유명한 경성콤그룹을 만든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