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경성콤그룹과 일제 말 비밀결사들 ==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되지 않은 거물’이라고 불렀다. 이재유와 함께 비합법 혁명운동을 이끌던 이관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한군데로 집중했다. 바로 이관술이었다. 그를 가리켜 “이재유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혹시 수사망을 피해 국경 너머 만주로 도주한 것이 아닐까, 경찰 기록에는 그런 추측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관술의 소재가 포착됐다. 그는 국외로 도주한 게 아니라 조선 내지를 버젓이 활개 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성 시내 한가운데서 그러했다. >---- >[[임경석]], 임경석의 역사극장: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085.html|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1939년에는 [[이관술]]의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지도하에]] 만기출소한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등 이재유 그룹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어갔다. 경성콤그룹에는 이후 화요파의 [[박헌영]]도 영입되었다.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가 경성콤그룹의 기반이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탄압 속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을 벌인 국내 운동의 최후 조직이었다.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박헌영은 [[이관술]]이 지도하는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과 연계를 맺었다. 이 시기 헌병경찰 체제는 한층 강화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은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관술이 지도했던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유일한 그룹이었다.” >---- >소련군정 문서[[http://db.history.go.kr/id/fs_006_0020_0020|#]] 주요 활동가들이 이재유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동맹휴학과 파업으로 일제에 맞서 왔으나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는 전시체제라 도저히 동맹휴학과 파업이 불가능하여 대신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경성콤그룹피고인명단.jpg|width=100%]]}}}||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순으로 핵심적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은 검거되지도 않았으면서 중간에 잠수타버렸지만 이관술, 이현상, 김태준 등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검거되어 고문당했음에도 경찰로부터 탈출한 뒤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방비도시고문.jpg|width=100%]]}}}|| ||'''영화 [[무방비도시]] 속 나치에게 고문당하는 이탈리아 공산당원. 조선공산당 독립운동가도 이렇게 일제에게 고문당했다.''' ||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바로 김단야[* 김단야는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죽었다.]였다. 일본 경찰은 이 허위 진술을 날름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건 최종 보고서에 김단야가 마치 이관술의 상급자인 양 묘사했다. 경찰만이 아니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 신주백의 논문 <박헌영과 경성콩그룹>을 말한다.]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인식은 일본 고등경찰이 품은 그림일 뿐이지 실제 사실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이관술의 진술 투쟁이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214.html|#]]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44/index.html|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 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해방 직후) 우리는 박헌영 동지가 해외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 >권오직(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위에서 볼 수 있듯 경성콤그룹 간부 김태준, 권오직이 박헌영이 잠수탔고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은 경성콤그룹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판서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했음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박헌영이 숨어있는 것에만 감동하여 박헌영의 일제 말기 항일운동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성콤그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