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조선인민공화국 === 조선공산당 정식 재건 전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먼저 선포된다.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대중에 뿌리내린 지도중심을 형성하고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급속하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박한용, [[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bc5f7ddbb4d7c61bffe0bdc3ef48d419&keyword=%EB%B0%98%EC%A0%9C%EB%8F%99%EB%A7%B9#redirect|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p4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 ||<-2>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1891)|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1889)|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1905)|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1905)|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 ||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1906)|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 ||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정치인)|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27|출처]]}}} || 조선인민공화국은 당대 대중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아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4>(1) 국호는? || || 1위 || '''조선인민공화국''' || 1708표 || '''70%''' || || 2위 || '''대한민국''' || 604표 || '''24%''' || || 3위 || 기타 || 8표 || 1% || || 4위 || 기권 || 139표 || 4% || ||<-4>(2) 정권 형태?|| || 1위 || '''인민위원회''' || 1757표 || '''71%''' || || 2위 || '''종래 제도''' || 327표 || '''14%''' || || 3위 || 기타 || 262표 || 10% || || 4위 || 기권 || 113표 || 5% || ||<-4>(3) 토지개혁 방식?|| || 1위 ||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표 || '''68%''' || || 2위 ||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표 || 17% || || 3위 ||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표 || 10% || || 4위 || 기권 || 99표 || 5% || ||<-4>{{{-2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35939054&referrerCode=0&searchKeyword=%EC%97%AC%EB%A1%A0%EC%A1%B0%EC%82%AC|출처]] }}}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