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중앙위원회 구성 === [include(틀:한국의 정부수립 이전 정당)] [[광복|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서울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결성했다해서 '장안파'라고 불렸다. 장안파는 강령이나 규약, 당면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조직력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성 10여 일 만에 '재건파'의 해체 요구로 그 세력이 대부분 와해된다. [[박헌영]]은 [[경성 콤그룹]] 조직원들을 만나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재건파이다. [[박헌영]]이 장안파를 제압하고 8월 24일 장안파가 해산되었다. 다만 이영, 정백 등 일부는 한동안 독자세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장안파 잔여세력 외 또다른 박헌영 반대파로 영등포 지구당이 있었다. 지금은 재건파가 골수 빨갱이, 장안파가 전향 온건파 느낌인데 실제로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재건파가 온건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이론, 장안파가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을 주장했었다. 장안파는 투쟁경력은 밀리면서 너무 급진적 주장을 했다.[* 출처: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지금 이미지와는 달리 당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재건파가 세력이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재건파의 골수 빨갱이 이미지와 달리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하는 반박헌영파 김철수도 재건파에 합류했기에 재건파로 분류된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박헌영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적 없고(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서 활동) 광복 후 저 명단 발표 때도 외국에 있었고 앞으로도 조선공산당 중앙이 있는 서울에서 활동할 일 없고 평양에서도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데 박헌영 계열이 소련이 김일성을 밀어준다는 등의 정보를 갖고 있어서 서열 2위에 넣은 것.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 중앙위원 ||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1905)|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1889)|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김무정|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1906)|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1902)|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 || 중앙검열위원 ||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기구의 인선은 다음과 같다. * 책임비서: [[박헌영]]. * 정치국: [[박헌영]], [[김일성]], 이주하, [[김무정]], 강진, [[최창익]], [[리승엽]], [[권오직(1906)|권오직]]. * 조직국: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김형선. * 서기국: 이주하, 허성택, 김태준, 이구훈, [[이순금]], 강문석. [[이관술]] 등 중앙검열위원을 중앙위원과 서열을 비교하면 어떨지 궁금한데 아래를 보면 적어도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는 중앙위원 서열 2위에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 역사와 현실은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비평사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이고 이 내용은 구글 도서 검색에서 '이관술 서열'을 검색하면 나온다.] >---- >기광서,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집권과정, 역사와 현실 48호, 253쪽 신주백의 책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에 따르면 이관술은 본래 조직부장이라는 직책에 추천되었는데 본인이 사양했다. 그래서 조직은 이관술보다 서열이 낮았던 김삼룡, 이현상, 김형선 등이 맡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20여 년간 노력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염원하던 조선공산당을 만들었다. 수십 년 뒤인 1980년대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가 죽기 전 자신의 "비문 앞에는 <공산당원 김철수>라고 적으면 된다."라고 말해 주위 사람이 "'애국지사' 또는 '독립투사 '이런 것 앞에 붙이셔야지요" 라고 하니 "공산당원이란 이름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sowoozee/222790258635|출처: 김철수 기념사업회 운영자의 블로그]]] 반공이 대한민국 이념이 된 이후에 태어난 국민들에겐 낯선, 조선공산당이 얼마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염원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는가를 알려주는 인상적인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