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주요 활동과 몰락 ===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기 초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온건하게 군정청에 협조했다. 조선공산당은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아니며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평화혁명론을 채택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94706350bbdc52acffe0bdc3ef48d419&keyword=%EC%A1%B0%EC%84%A0%EA%B3%B5%EC%82%B0%EB%8B%B9|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조선공산당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의료보험, 국민연금, 가족수당 등 세부사항까지 260가지에 이르는 청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https://naver.me/xGiKKGgn|#]]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던 조선공산당은 최대정당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정예당원 3만 명의 항일운동 옥살이 햇수를 합치면 6만 년이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독보적이었다. 같은 시기 반파시즘 투쟁 공로로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이 잘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일제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하였던 이관술이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한 것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차별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고문, 학살되었던 것도 이 사상이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이재유 조서에 따르면 이재유는)"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취지에서 활동"하였다.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다음은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 당시의 기자와 박헌영의 실제 문답이다. 박헌영은 비록 이후 월북하고 1948년쯤 되면 폭력 노선을 추구하지만, 1946년 박헌영의 대답을 보면 1946년까지는 온건 노선과 민주주의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은 사회주의 조선이 언제 건설될지는 모르며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라며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 변혁에 나서겠다고 했었다. >기자: 조선은 소비에트화하지 않는가? >박헌영: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서 봉건 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 >기자: 조선에 소비에트국이 건설되면 소련에 편입되는가? >박헌영: 현 계단은 봉건적 잔재를 청소하는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으므로 사회주의 조선이 언제 건설될지 모르나 10년 혹은 20년 후에 건설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언제나 독립한 나라로 자립한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66576698&referrerCode=0&searchKeyword=%EC%98%A4%EB%B3%B4|출처]] 한편 질문이 상당히 악의적이며 실제로 대답엔 그다지 문제가 없었는데도 질문 내용 자체가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의 오보 내용이 된다. 이에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미국인 기자 로버트 콘월이 다음과 같이 존스턴에게 반박했었다. >나는 박헌영이 1월 5일 회견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을 위해 통치되는 민주주의 조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66576698&referrerCode=0&searchKeyword=%EC%98%A4%EB%B3%B4|출처]] 1946년 5월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고문조작 사건을 만들어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란, 미군정이 천만원의 위폐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다. 이재유 그룹 출신 조선공산당 지도자 [[이관술]], 6.10만세 운동 지도자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1906)|권오직]], 3차 조선공산당 출신이자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의 동지 박낙종, 송언필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관술은 여론조사에서 박헌영과 득표율 차이가 별로 없고 김일성보다 높은 득표를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중적으로나 좌익 내부에서나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https://pressian.com/pages/articles/33242#0DKW|#]] ||<-3>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 2위 || [[이승만]] || 21% || || 3위 || [[김구]] || 18% || || 4위 || [[박헌영]] || 16% || || 5위 || '''[[이관술]]''' || 12% || || 6위 || [[김일성]] || 9% || || 7위 || [[최현배]] || 7% || || 8위 || [[김규식]] || 6% || || 9위 || [[서재필]] || 5% || || 10위 || [[홍남표(1889)|홍남표]] || 5% || ||<-3> {{{-2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16816107&navType=by|출처]]}}} ||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통화발행고.png|width=100%]]}}}||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의 통화발행고 [br]세로 축: '''억''' 원 / 가로 축: 연도 및 월 || 이에 역사학자 김기협은 <해방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30억짜리 위폐단이 겨우 1천만 원짜리 위폐 사건을 짜 맞춰 '경제 교란' 책임을 따지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 >김기협, 해방일기 [* [[위조화폐]]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조화폐를 이용해 적국의 경제를 교란시키는 것은 2차대전때 나치독일에 의해서 시행된 작전이며, 미군정이 발행한 통화가 100억 원이라면 천분의 1인 1000만 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현대의 통화량과 대비하자면 2022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본원통화는 276조원 규모인데 그 천분의 1은 2760억원으로 그 정도 액수의 위폐가 시중에 돌아다닌다면 한국경제는 엉망진창이 된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재판과정에서 부당하게 진행되었다는 것, 미군정이 경제정책에서 실패를 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1000만원의 위조지폐발행이 진실이었다면 국가전복수준의 죄가 맞는 것이다.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해서 억울하게 중범죄의 누명을 쓴 것을 별것 아닌 누명으로 평가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고대에도 현대에도 위폐제작은 중범죄라는 실제역사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다만 김기협 교수는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기 위해 저리 표현한 것이다. 21세기까지도 드라마에서는 당대의 초인플레이션이 정판사 위폐사건 때문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수십억 원이 범람하게 한 실책에 비해서는 천만 원은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인 것은 맞으니까.] 누명 쓴 독립운동가 중 특히 이관술은 해방의 날까지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던 투사 중의 투사이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친일파 고문기술자 [[노덕술]]과 악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노덕술은 이관술을 고문하며 괴롭혔었는데 해방 후 노덕술은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노덕술최난수.jpg|width=100%]]}}}|| ||'''고문기술자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일제고문도구.jpg|width=100%]]}}}|| || '''일제가 사용한 고문 도구들'''[[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8594|출처]] || >(반제동맹, 경성콤그룹 사건 때)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정판사 사건 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중략) >그는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https://www.joongang.co.kr/article/2426766|#]], [[http://naver.me/xOvZtdHI|##]] 박낙종, 송언필은 박헌영이 싫어서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중심으로 공산당을 재건하려 했던 사람들인데 아직까지도 누명을 못 벗고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간첩" 취급당하고 있다.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과 노동자들은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 학살당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고통엔 공감과 감정이입을 못하고 오직 박헌영 오로지 박헌영이 월북한 것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조선공산당은 7월 22일 하지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파괴공작이라고 비판하고, 8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자위적 수단을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51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의 공판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하여 7월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다. 초창기 미군정에 온건한 노선을 취했던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대중적인 투쟁'을 결의하면서 [[9월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섰다.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조선공산당은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판사 사건으로 대중들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다. 경남 하동군의 또 다른 농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이 조선의 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받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할복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은 대중의 통념과 달리 정판사 사건 때문이 아니다. 박헌영의 경우 적대적 선전활동이 맥아더 포고령 위반이라며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이주하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이렇게 체포해도 몇 개월 못 가둬두면서 탄압하는 인상을 줘 정치적 부담만 되는 체포령을 내린 것은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서중석]]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가 의문을 제기한다. 위 이주하 수감에 얽힌 에피소드로, 이주하는 9월 초 <안녕, 질서에 관한 죄> 위반으로 수감 중이었는데 미군이 자백제로 추정되는 주사를 놓고 박헌영의 행방 등을 심문했다. 이주하는 이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선고 공판만을 남겨 둔 [[이관술]]이 이주하를 "동정하여" 출정거부와 단식투쟁을 한다. 재판장은 구인장을 발부하여 이관술을 강제로 출두시킨다. 그런데 이주하와 이관술의 처지를 비교해보면 이주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인데 반해 이관술의 죄명은 너무 끔찍하고 이관술은 직전에 "이 사건은 벌써 유죄로 인정되어 있어 어떤 기정 방침대로 진행되는 것 같은 바에야 나로서는 변호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스스로 무기징역이 확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관술이 이주하를 "동정한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으로 이관술 성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https://m.blog.naver.com/jeongpansa/222439826792|#]] 9월 총파업 도중 노동자에게 발포하자 대구 시민이 분노해서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난다.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에 따르면, 대구 10.1 사건 이전에도 좌익에 대한 테러에 시민들이 분노하곤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한 아가씨가 좌익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문을 벽에 붙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두들겨 팼다. 몇몇 여자들이 미국 경찰에게 달려가 이 구타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은 조선인들의 내부 문제다. 우리와 상관없다."라는 익히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깡패들의 손아귀에서 피범벅이 된 여학생을 구해내었다. "바로 이렇게 일본 압제자들이 우리를 구타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두들겨 팼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나이든 농촌 아낙네가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러한 광경이 1946년 서울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대중적인 정당이 되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 합당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180|자세한 정보]] 대회파의 요구는 박헌영 측근 위주로 밀실정치하지 말고 당대회를 열어서 당의 노선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대회파에 우호적이었던) 고준석에 따르면 대회파는 공산당에서 40% 정도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합당 이후의 조선공산당의 행보는 [[남조선로동당]], [[사회노동당]]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