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문단 편집) == 연혁 == [[파일:kimikdoo1.jpg|width=250]] 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총회장 [[김익두]][* 깡패 출신으로 목사가 되어 회개한 걸로도 유명하다. 목사가 되어 자신이 패던 상인들 앞에 나타난 후론 맞으면서도 보복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반도의 초창기 시기 개신교계의 큰 별 중 한명이기도 하다. 사족으론, 삼남이 대한민국 축구계의 초기 기틀을 다진 [[김용식(축구인)|김용식]]이다.] 목사 [[파일:kangryanguk1.jpg|width=250]] 조선기독교도련맹 전 위원장 [[강량욱]] 목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1946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창립대회 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일성]]의 외종조부이자 창덕학교 학창 시절 스승 강량욱 목사가 선출되었으며,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 시 총회장[*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이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으로 일제강점기 많은 부흥과 은사를 행한 명망 있는 개신교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총회장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38선]] 넘어 북진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을 지지한 이유로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에게 [[신천군]] 서부교회에서 예배 중 살해당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유일한 지도자로 남은 [[강량욱]] 목사는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남았다. 1946년 [[3·1절]] 기념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소련군정]] 및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이북5도연합노회 주도 [[개신교]] 간 발생한 갈등이 계기가 되어 친정부 개신교 단체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1946년 6월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량욱]] 목사를 주동으로 [[일제강점기]] 중국 [[산둥성]] 선교사였던 박상순 목사, 일제강점기 유명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 그 외 [[김응순]] 목사, 조택수 목사, 홍기주 목사[* 감리교.] 등 친정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 결성준비위원회를 준비했다. 1946년 11월 28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했으며, 창립대회 후 교단 조직을 확대해 도·군·면 단위 지역기독교도련맹 조직을 구성하였고, 1949년 조선기독교도련맹 총회를 개최하여 김익두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장직 있던 상황에서 총회장직은 이 연맹 내 일종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래지 않아 6.25 전쟁 시기 김익두 목사가 살해당함으로써 사라지게 된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46년]] 6월경 결성준비위원회부터 1946년 11월 28일 창립까지 평안도보다는 [[황해도]]·[[함경도]]의 [[개신교]] 신자들을 주된 기반으로 하였으며,[* 일례로 [[김응순]] 목사는 구한 말 최초로 창립된 개신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창립 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조직 확장 과정에서 이북 전역의 개신교 신자들로 그 기반을 넓혀 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강량욱]] 목사가 대표하는 어용 세력은 1946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실시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등 이미 연맹 창립 전부터 적극적 친정부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토지개혁 실시 후에도 (기존 이북5도연합노회가 주일 성수 명분으로 참가를 거부한) 1946년 11월 3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 적극 참가를 주장하는 등 일관된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창립하고 나서 이북 개신교 주도권을 놓고 이북5도연합노회와 더 적극적으로 경쟁했으며, 북한 당국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조선기독교도련맹을 지원하고 반대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이북5도연합노회를 탄압하여, [[광복]] 직후 결성된 이북5도연합노회는 [[한국전쟁]] 발발 무렵이면 주요 인사가 [[체포]]되거나 [[월남]]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은 [[한국전쟁]] 중 북한 정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기념예배"를 하는 등 친정부 활동을 벌였는데, "서울 탈환 기념예배" 외에도 [[1950년]] 8월 5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주관으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기독교도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1952년]] 11월 19일 월북한 [[김창준(목사)|김창준]]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합동으로 '''"남북 조선 기독교도 항의대회"'''가 열려 [[미국]]을 비난하고 미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되었다.[* [[강량욱]] 목사는 [[북한]] 정부와 김일성 수상에 전적으로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점'''이 빌미가 되어 한 때 김일성 반대파에게 공격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에 반대한 세력 일명 종파주의자들은 내내 비주류였으며 김일성 절대 권력과 개인 우상화에 토를 달다가 숙청당했지 김일성의 권력이 제한된 적은 없다.] 조선기독교도련맹으로 구성된 어용 세력은 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강량욱 목사는 1945년 해방되자마자 이미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이미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어 1946년 2월 1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의 다른 신자들도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입당했으며,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북한)|인민위원회]] 공직에 피선(被選)되었다. 1946년 2월 초대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장로가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연금되자 강량욱은 [[최용건]] 세력과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조선민주당을 주도했고, 1958년 최용건 세력이 탈당해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하면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세력이 완전히 조선민주당 당권을 잡았다. 김일성의 바지사장인 [[최용건]]이 구색 맞춰 출범한 조선민주당은 1946년 7월 22일 [[북조선로동당]] 등 정당·사회단체들이 가입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맹했으며, 1948년 8월 25일 초대 최고인민회의 및 지방인민회의 선거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통하여 공동으로 후보를 공천해 출마했다. 1949년 6월 27일 남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해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는 조선민주당과 조선기독교도련맹 둘 다 가맹단체로 참가했다. 강량욱 목사 본인도 [[1948년]] 초대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대의원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이 된 이래 부주석이 될 때까지 계속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정치에 적극 관여한 조선기독교도련맹 인사 중 강량욱 목사는 대의원으로만 일하지 않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하여 각종 국제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다가, 1972년 [[사회주의헌법]]으로의 개헌과 동시에 부주석으로 피선되어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1958년 조선로동당으로 복귀한 최용건을 대신하여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1981년]] 1월 28일~29일 간에 개최된 [[조선민주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광복]] 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2/3 이상이 이북에 있었고, 이북 개신교는 한반도 전체의 개신교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인한 교회 파괴와 정부에 의한 교회 폐쇄로 이북에 단 하나의 교회 예배당도 남지 않게 되었고, 6.25 이후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는 완전히 박멸되었다. 1989년 13차 평양 세계청년축전을 앞두고 외국과 외신에 '종교의 자유'를 보여주고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건축되기 이전에는 어떠한 교회도 북한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에 관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을 나눈 적도 있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 조동진 목사는 [[6.25 전쟁]] 전 3천여 곳에 달했던 교회 예배당 중 500여 곳은 전쟁 중 포격이나 폭격으로 파괴되고 나머지는 용도 변경되었으리라 추정했다. 대략 신자들도 전란 와중 죽거나 대거 월남하고 더러는 북한 정부에 의해 극렬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사형]]당하는 등 크게 감소했고, 살아남은 신자들도 당장 [[생존]]의 문제가 닥치고 전란 직후의 북한 정부와 주민의 극도로 악화된 반(反)[[기독교]] 감정 때문에 공개 신앙활동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더구나 1958~1960년 북한 정부와 조선로동당의 대대적 반종교 선전과 종교인 제재 조치 때문에 그나마 잔존하던 [[북한]] 개신교 신자들이 지하로 숨었다. 이로 인해 어용조직인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마저 한국전쟁 후 상당기간 사라졌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조선로동당과 그 유관단체의 출판사들은 1959년에만 반(反)종교 소책자를 여섯 권이나 출판하며 [[종교]]를 [[반대]]하는 선전에 집중했다. 정하철이 쓴《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여야 하는가》(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로재선이 쓴 《미제는 남조선에서 종교를 침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조선로동당 출판사, 1959년), 김희일이 쓴 《인민의 아편》(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노재선이 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백원규가 쓴 《종교도덕의 반동성》(조선민주청년동맹 출판사, 1959년), 작자 미상의 《생활과 미신》(조선여성사, 1959년) 이 6권이 바로 1959년 한 해에 [[출판]]된 반(反)종교 대중교육용 소책자이다.] 한국전쟁 도중 북한 정부의 교회 폐쇄 외 미군 폭격으로 교회 예배당이 파괴되고 교인들이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신의주제1교회·신의주제2교회·의주읍교회·[[용천군]] 동상교회 등이 그런 사례이다. 또한 북한 정부에게 희생당한 개신교 신자들과는 반대로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북한]] 정부에 협조하던 조선기독교도련맹 신자들이 희생되기도 했는데, [[용강군]] 진지동교회 [[장로]] 김석훈·[[강서군]] 강서교회 장로 김광한·[[정평군]] 무산교회 장로 한성도·[[운산군]] 입석교회 장로 강처인·[[안악군]] 봉산리교회 장로 김영섭·평안남도기독교도련맹 위원장 윤재만 [[목사]] 등이 그런 사례이다. [[한국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파괴되거나 용도 변경되는 등 사라지면서 북한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서 예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중추를 이루는 [[가정]]예배 처소의 시초가 되었다. 가정예배 처소의 실존 여부는 전 [[조선로동당]] 간부로서 한국에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전향한 신평길의 증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북한 정부에서 1960년대 말 '풀어주는 사업'을 통해 원래 개신교 신자인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가정에 모여 가지는 예배를 공식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김흥수 [[목원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가정예배 처소를 운영한 [[개신교]] 신자들은 한국전쟁 전부터 [[북한]] 정부에 협조하거나 전쟁 중 북한 정부에 공을 세웠거나 [[조선로동당]] 간부와 인척 관계에 있는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일찍이 [[북한]] 정부에 협조하여 전쟁 후 가정예배 처소 예배를 허락 받은 사람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도 있었는데, [[김일성]]의 특별 배려로 그녀는 개신교 신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여성동맹에 입당·가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재독교포였던 이영빈 목사의 아버지 이풍운 목사도 1960년 소천 시까지 [[원산]]에서 가정예배 처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감리교 이영빈 목사는 1956-1960년 독일에서 아버지와 서신 교환을 한 것 외에 1981년 방북하여 원산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가정예배 처소 책임자였던 리성봉 장로(책임자)는 뒤에 2대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파일:강량욱19720831.jpg|witdh=250]]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강량욱 목사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7·4 남북공동성명]]을 기점으로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이 재개되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중 강량욱 목사가 남한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때 강량욱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목사이며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조선기독교도련맹의 공개 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대외 활동이어서, 남한에서 발생하는 여러 시국 사건에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과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거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개신교 국제조직과의 교류 등이었다. 하지만 [[1972년]] 9월 목회자 양성 목적으로 1950년 7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평양신학원을 개원하는 등 대내 활동도 아예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원은 개원하면서 [[강량욱]] 목사를 원장으로 하였으며, 전쟁 전 평양신학교나 [[감리교신학대학교|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한 이영태 목사·김득룡 목사 등이 강의를 맡았고, 이렇게 재개된 신학교육을 통해 [[고기준]]·김운봉 등 나머지 조선기독교도련맹 간부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남한]]·[[북한]]·[[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 [[1976년]] 미국 민주당 카터 정부가 취한 미국인 북한 여행 허용도 이 교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개신교 국제조직을 통한 남·북·교포 개신교 신자 간 교류는 종교 교류보다 [[통일]]운동 확산에 그 목적이 있었으나 [[종교]]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 때 [[북한]] [[개신교]]와 교류하고자 한 [[남한]]·[[교포]] 개신교 신자들은 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연관된 진보·개혁적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남·북·교포 개신교 삼자 간 첫 공식 접촉은 1986년 9월 2-5일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 주최 세미나에서 성사되었다. 이 회의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책위원장 강문규 목사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한 다음 삼자 간 [[성만찬]]와 [[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스위스 제네바 인근 글리옹(Glion)에서 1988년과 1990년 두 차례 더 회의가 개최됐다. 이렇게 스위스 글리옹에서 세차례 개최된 남·북·교포 개신교 간 회의는 각각 '제1차 글리옹 회의', '제2차 글리옹 회의', '제3차 글리옹 회의'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제3차 글리옹 회의 후 글리옹 회의는 지속되지 못한다.[* 제3차 글리옹 회의 후 일본 도쿄에서 삼자 간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이는 글리옹 회의라 명명되진 않는다.] [[파일:홍동근목사조선기독교도련맹방문(1981년9월28일월요일).jpg|width=600]] 1981년 9월 28일 홍동근 목사 방북 중 찍은 홍동근 목사와 조선기독교도련맹 관계자들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고기준 목사[* 1921-1994,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서기장.], 김득룡 목사[* 1910-1993,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부위원장.], 홍동근 목사, 김운봉 전도사[* 당시에는 전도사였으나 후에 목사로 안수받는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 입당 예배 때 설교를 맡았다.]. [[파일:글리온회의(1988년11월24일).jpg|width=600]] [[1988년]] 11월 24일 제2차 글리온 회의[* 1988년 11월 23일~25일.] 중 찍은 남·북·[[교포]] 개신교 관계자들 모습. 사진의 맨 하단 좌측 세 번째 인물이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1980년대는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방북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조선기독교도련맹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 [[시작]]되어 1980년대 초반 본격화된 해외 [[교포]] 개신교 신자의 친지 상봉을 목적으로 한 방북은 북한 가정예배 처소 신앙생활의 공개 계기가 되었다. 1978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여동생들과 부모 묘소를 방문하고 나서, 조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는데, 이승만 목사는 훗날 당시 면담 자리에서 강량욱 목사가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목사는 아버지 이태석 목사를 [[한국전쟁]] 와중 북한 당국에 잃는 아픔을 겪은 인물로서, 이집트 카이로 출장 시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관과 접촉하여 북한에 잔류한 가족 생사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당시 [[북한]] 부주석 [[강량욱]] 목사의 초청을 받아 방북할 수 있었다.[* 물론 이승만 목사(1931년 3월 25일-2015년 1월 14일)는 이승만 대통령과 [[동명이인]]이다. 그는 1991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회장이 되었고, 2000년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의 총회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1950년]]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동년 10월 [[유엔군사령부|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평양 진격 후 그를 찾아다니던 아내에 의해 인근 방공호에서 총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79년 4월,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총무 노의선 목사(1911-1993)[*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신자.]가 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노의선 목사는 방북 중 당시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장 [[강량욱]] 목사를 면담했다. 1981년 6월, [[평양]] 출신 [[재미교포]] 조국통일촉진회 회장 김성락 목사(1902-1989)[* 전(前)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1937-1958), 전(前) 숭실대학교 총장(1958-1964).]가 [[고향]] 방문 목적으로 방북했다. 김성락 목사는 방북 중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강량욱]] 당시 위원장 목사를 면담했으며,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면담과 오찬을 같이 했는데, 식사를 앞에 두고 김일성이 그에게 식전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1981년 9월 18-29일, [[평안북도]] [[피현군]] 출신 [[재미교포]]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1926년 5월 15일-2001년 11월 11일)[* [[향린교회]] 전(前) 담임목사 홍근수 목사의 형.]가 친지 상봉 목적으로 방북했다. 홍동근 목사는 [[피현군]] 인근 [[개천시]]을 방문하여 어머니와 형제·자매와 상봉하고 나서, 북한을 떠나기 전날 1981년 9월 28일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해서 당시 간부였던 고기준 목사, 김득룡 목사, 김운봉 전도사와 담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방북에서 홍동근 목사는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했을 뿐 가정예배처소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사 방문 전 오전 일찍 찾아온 사회과학원 교수 진철국(陣鐵國)이라는 사람에게 1:1로 [[주체사상]] 강의--과외--를 듣기도(...) 했다.] 이 방북을 시작으로 홍동근 목사는 지속적으로 방북했다. [[1988년]] 북한 정부 수립 40주년을 맞아 치러지는 9·9절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했고,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초대받아 참석하던 도중 [[김일성]]과 면담했다. 이뿐만 아니라 [[1990년]]부터 [[2001년]] 소천할 때까지 매년 방북하여 평양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강의했다.[* 재미교포 목사 중 홍동근 목사뿐 아니라 조동진 목사도 같은 시기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되어 조그련 신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이 방북한 해외 교포 개신교인들에게 공개한 가정예배 처소 중에는 평양뿐 아니라 평안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도 있었다. 1981년 6월, [[함경남도]] [[원산시]](현 [[강원도(북한)|강원도]] 원산시) 출신 재독교포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회장 이영빈 목사가 아내 및 이화선 목사와 함께 방북했다. 이영빈 목사는 방북 중 [[강원도]] 원산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영빈 목사 방북 시 그가 방문했던 [[원산]] 가정예배 처소 책임자는 리성봉 전도사였는데, 그는 훗날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82년 7월, [[간도]] [[용정]] 출신 재캐나다[[교포]] 토론토한인연합교회(현 알파한인연합교회) 전충림 장로, [[충청북도]] [[진천]] 출신 [[재미교포]] [[퀘이커]] 신자 차상달 씨가 [[미국]] [[퀘이커]] 지원으로 방북했다. 그들은 방북 중 3곳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했다. 1986년, [[평양]] 출신 [[재미교포]]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PCUSA) 선교부 이승만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승만 목사는 방북 중 평양 경상골 가정예배 처소 예배에 참석했다. 1986년,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고 가정예배 처소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표단은 [[개성시|개성]]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19일-26일,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NCCC) 대표단이 재차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와 가정예배 처소 4곳을 방문했다. 미국교회협의회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미국교회협의회 방북 대표단은 아리 브라우어(Arie Brouwer) 미국교회협의회 총무, 드웨인 엡스(Dwain C. Epps) 미국교회협의회 부총무·국제부장, 윌리엄 크리비(William Creevy)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 목사, 마틸린 로체스터(Mattilyn T. Rochester) 아프리카 감리감독 시온교회(the 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평신도지도자, 함성국 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방북에서도 대표단은 평양뿐 아니라 지방의 가정예배 처소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표단은 개성에서 개성시그리스도교련맹 부위원장을 만났으며 [[개성시|개성]]의 가정예배 처소 3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대표단 중 이북 출신 [[재미교포]] 함성국 연합감리교회(UMC)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는 개성 지역의 한 [[가정]]예배처소 예배에서 전쟁 전 [[평양]] 성화신학교 동기 오사문과 재회하기도 했다.''' 대표단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외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같은 다른 공인 종교단체들도 방문했으며, 조선민주여성동맹과 [[평양산원]] 등 사회단체와 복지시설도 방문했다. 대표단은 방북 일정 초반 [[주체사상]]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는 주체사상 외 [[니케아 공의회]] 등 그리스도교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루돌프 볼트만·위르겐 몰트만·[[아우구스티누스]]·박형규 등의 인물들을 전거로서 언급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nk.chosun.com/church2.jpg|width=400]] 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114948_48031_4355.jpg|width=400]] 2008년 재건축 전 봉수교회 내부 모습 [[파일:external/blogfile.ohmynews.com/357131.jpg|width=400]] 2014년 재건축 전 칠골교회 1988년과 1992년 사회주의권 해빙과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영향을 받아 평양에 예배당 2곳이 건립되었는데, 바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다. [[봉수교회]]는 1988년 11월 6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으며, [[칠골교회]]는 1989년 거의 완공 단계까지 건축했다가 다시 건축해서 1992년 11월 29일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중 칠골교회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를 재건한 것이다. 봉수교회는 2008년 재건축되었으며 칠골교회는 2014년 재건축되었다. 1988년 11월 6일, 봉수교회에서 김운봉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88년 11월 4-12일, [[캐나다]]교회협의회(Canadian Council of Churches)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의 종교시설 및 종교단체들을 방문했다. 방북단은 테리 브라운(Terry Brown) [[성공회]] 주교, 글렌 데이비스(Glenn Davis) [[장로회]] 목사,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리아 화이트헤드(Ria Whitehead) 그리고 [[가톨릭]] 테리 갤러거(Terry Gallagher) 신부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캐나다에서도 캐나다교회협의회 가맹 교단이 아니지만, 특별히 테리 갤러거 신부가 캐나다교회협의회 방북단에 참가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단독 초청으로 방북한 이들은 11월 6일 '''봉수교회 첫 주일예배에 참석'''했으며 축성된 지 1달이 채 되지 않은 [[장충성당]]에 방문했다. 1989년 1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미국]] 선한사마리아인교회 담임 홍동근 목사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초청을 받게 된 계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한 박관오를 알게 되어서이다.] [[향린교회]] 담임이었던 홍근수 목사의 형 홍동근 목사는 이미 1981년부터 비교적 자주 북한을 방문해온 진보 성향 개신교 인사였고, 조동진 목사는 원래 [[한경직]]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었던 "북한해방기도운동"에서 활동하는 등 보수 성향 개신교 인사였지만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대북 교류에 나서게 된 인사였다. 1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두 사람은 1월 22일·29일 두 차례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동진 목사는 박관오 총장·최장룡 부총장의 안내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를 시찰했으며, 홍동근 목사와 마찬가지로 [[월남]][[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으로서 방북 일정 중 평안북도 의주군을 방문하여 친척들과 상봉하고 조부모의 묘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89년 3월 25일-4월 4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좌파 성향 민주화운동 단체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신.]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가 야당 출신 사업가 유원호, [[재일교포]] 작가 정경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황석영]]과 함께 방북했다. 문 목사는 도착 당일(3월 25일) 순안공항에서 친척 누이를 만나고, 이튿날(3월 26일) 봉수교회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으며, 주일 다음날(3월 27일) [[김일성]]과 첫 번째 면담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는 3월 28일 봉수교회 오른쪽에 위치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를 방문하여 위원장 강영섭 목사, 부위원장 리철 목사, 서기장 고기준 목사, 봉수교회 담임 리성봉 목사와 함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장재언]] 사무엘, 장충성당 초대 신도회장 박경수 바오로와 만났으며, [[3월]] 29일 [[조선로동당]]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면담했고, 3월 30일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하여 [[조선불교도련맹]] [[간부|승려]]들과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4월 1일 자신이 묵던 숙소에 찾아온 [[김일성]]과 두 번째로 면담을 가졌고 이튿날 4월 2일 [[장충성당]] 공소예절에 참례했으며 같은 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간부들과 면담 및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4월]] 3일 북한을 떠나 베이징 경유해 도쿄에 잠시 머무르며 현지 한인 교회에서 보고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3일 귀국했고 바로 체포·구속되었다. 1990년 11월 23일-12월 4일,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 데일 키츠맨(Dale Kietzman) 수석부총장, 찰스 위크맨(Charles Wickman) 개발담당 부총장이 김일성종합대학·김형직사범대학의 공동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자들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형직사범대학의 캠퍼스를 시찰하는 것 외에 11월 25일 [[옥류관]]에서 전(前) 국제연합 주재 북한 대표[* 당시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국제연합 미가입 상태였고, 단지 참관국으로 국제연합에 대표부를 두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한시해와 석찬(夕餐) 겸 면담을 가지는 등의 일정을 가졌다. 한시해 부부장과의 석찬 겸 면담 자리에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은 그에게 미국과 북한 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일성종합대학·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선로동당 인사들과 함께하는 미국 방문을 권유했는데, 한시해 부부장은 처음에 시큰둥해 했지만 데일 키츠맨 부총장의 거듭된 권유와 방미를 가능하게 주선하겠다는 약속에 이를 수락했다[* 실제 데일 키츠맨 부총장을 비롯한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 총장단은 귀국 후 북한 정·학·종교계의 동시 방미 성사를 위한 주선에 힘썼다고 한다. 1991년 5월, 한시해 부부장을 비롯한 조선로동당 간부들·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조선그리스도교연맹 목사들이 미국에 방문하게 된다.]. 한편, 이 해 조동진 목사는 홍동근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원 초빙교수가 된다. [[파일:wccandncckvistedtonorthkoreainjanuary1992.jpg|width=600]] 왼쪽 끝부터 강영섭 목사, 권호경 총무, [[김일성]] 주석, 박경서 국장, 고기준 목사. 1992년 1월 7-1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권호경 총무와 세계교회협의회 박경서 아시아국장이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공동사업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41차 정기총회의 [[북한]] 대표단 참석여부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했다. 권호경 총무와 박경서 국장은 12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두 사람 중 권호경 총무가 설교를 맡았으며, 13일 오전 [[김일성]]과 조찬 겸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92년 3월 31-4월 5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방북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4월 2일 김일성과 면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4월 5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나서 김일성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을 부탁받아가지고 출국했다. 1992년 5월, [[서울]] 후암동교회 전(前) 담임(1960-1978) [[미국]] 윌리엄케리국제대학교(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 고려연구소 소장 조동진 목사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다. 방북 중 5월 23일 [[김일성]]과 오찬 겸 면담을 가졌으며, 같은 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하여 대회의실에서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식을 가졌고, 이튿날인 5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개신교 관련 도서 기증은 이미 1989년 1월 조동진 목사의 첫 방북 때부터 논의되고 있던 주제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한 개신교 관련 [[도서]] 권 수는 2,517권이며, 기증할 도서를 마련하는 데는 한국기독교출판협회 등의 도움을 받았다. 1992년 11월 29일, 칠골교회에서 강영섭 목사 집례로 첫 주일예배가 있었다. 1994년 1월 27일-2월 1일, [[미국]] 유명 보수 복음주의 성향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재차 방북했다. 이번에도 역시 북한 개신교 탐방 겸 미국 정부와 북한 정부 간 외교 중재 등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는데, 차이점이라면 대통령과 집권당이 [[빌 클린턴]]과 [[미국 민주당]]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9일 [[김일성]]과 가진 면담과 오찬 시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 답신을 받았으며, [[30]]일 [[칠골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1월 19일-26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단 7명(강문규, [[서경석(목사)|서경석]], 김명혁, [[박청수]], 최창화, 박남수, 윤남중)이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농업자재 지원 등 남북농업협력 방안 논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북했다. 방북 대표단 7명 중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문규 목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서경석 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강변교회 담임 김명혁 목사, 희망친구기아대책 회장 새순교회 원로 윤남중 목사 등 5명이 1월 24일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1999년 2월, 이름을 '조선기독교도련맹'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 개칭했다. 2001년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개최를 앞두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VCR]] 300대를 지원했다. VCR 지원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한국비디오선교회 제작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진 뒤 그 사용을 더 촉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평양 형제산가정예배처소, 평양 옥류가정예배처소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일부에서 성서통신대학 교재용 비디오테이프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김득중 교수의 《[[마가복음]] 강해》 강의 비디오테이프를 신자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북 중인 남측 개신교 신자가 목격한 바 있다.][* 현재 한국비디오선교회는 한국미디어선교회로 개칭했다.]. 2001년 8월 15일-21일,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참가 겸 북한 개신교 탐방을 위해 개신교 대표단이 남측 참가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다. [[개신교]] 대표단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동완 목사를 단장으로 윤병조 목사·성명옥 목사·박순경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박지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 간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개신교 대표단은 아니지만 통일연대 참가단 일원으로 당시 향린교회 담임 홍근수 목사와 [[미주]]교포 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 등도 방북했다. 방북 개신교 관련 인사들은 8월 16일 봉수교회를 방문하여 리성봉 목사·강영섭 목사 등을 만나 간단히 예배를 드렸으며, 8월 19일 봉수교회를 재차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1983년 1월 이를 오랫동안 맡았던 [[강량욱]] 목사의 소천 뒤 3년여 간 공석이었다가 조선적십자회, [[조선사회민주당]], 평양시인민위원회에서 간부로 일하던 김성률 목사가 1986년 9월에서 89년 1월까지 맡았다. 1989년 1월 김성률 목사가 퇴임[* 김성률 목사는 이 때 퇴임한 것이지 소천한 것이 아니다. 김성률 목사는 퇴임한 뒤 계속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등 [[정치인]]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사회민주당]] 기관지 계간 《조선사회민주당》의 보도에 의하면 김성률 목사는 [[2000년]] 12월경 소천했다.]하고 강량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2012년 1월 소천할 때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소천한 뒤 이듬해 [[2013년]]부터 강영섭 전 위원장 아들이면서 평양시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을 역임한 강명철 목사가 중앙위원장을 맡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