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왕조실톡/비판 (문단 편집) ==== 46, 47화 ==== 여러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온다. ● 작가가 직접 그린 지도가 나오는데 [[명나라]]의 영토를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를 포함한 모든 북방 영토와 [[베트남]] 일대까지 포함시켰다.[* 명의 영토는 요동까지였다.] [[베트남]]은 [[위화도 회군]]이 벌어지던 1388년 당시에 [[쩐 왕조]] 치하의 독립국이었다. 쩐 왕조는 1400년에 마찬가지로 영락제에 의해 멸망했고 베트남에는 교지포정사(交趾布政司)가 설치되어 명의 지배를 받았다.-- 역시 정복군주 [[영락제]]-- 동북면을 표기할 때도 [[평안도]]의 [[자성군]]과 [[량강도]]의 [[후창군]], 그리고 [[백두산]] 일대와 [[함경북도]]는 빠져야 하는데 뭉텅거려서 동북면으로 표기되었다. ● 동북면에 대해 설명하면서 '잘 크는 것이라곤 어린아이들과 [[감자]]뿐'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당시에 동북면에는 감자 같은 건 없었다(...). 조선에 감자가 유래된 건 1824년, 즉 [[순조]] 시기였다. ● 46화에서 [[우왕]]이 별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이성계]]에게 시비를 걸고 경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우왕이 통치 시기에 환락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나, 이성계 자신도 [[고려]] 왕실에 있어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일단 이성계가 지휘했다는 '''사병집단'''인 가별초(家別抄)의 경우는 사병혁파가 이뤄지던 [[태종(조선)|태종]] 시기에도 500호나 될 정도로 큰 규모였고 이성계 자신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으로서 거의 동북면의 봉건 영주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거기다가 이성계와 그 가문은 동북면의 [[여진족|건주 여진]]들과도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우왕]] 입장에서는 [[이성계]]를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려대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가 고려의 사방을 공격하고 있는 판에도]] 불구하고 수도 [[개경]]을 공격해 함락시켜 사실상 '''고려를 무너뜨렸다.''' ● [[이성계]]가 4불가론을 얘기하며 [[콜레라]]를 언급하는데 [[위화도 회군]] 시절에는 콜레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콜레라는 [[인도]] [[갠지스 강]] 일대의 오래된 풍토병이었으며 19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조선]]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虎烈刺)'라고 불렀는데 콜레라를 의미하는 일본어 '호열랄(虎烈剌)'을 잘못 읽은 것[* 剌(열)을 刺(자)로 잘못 읽었다. 비슷한 사례로 드라마 [[기황후(드라마)|드라마 기황후]]에서 '탑랄해(塔剌海)'를 '탑자해(塔刺海)'로 읽었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이성계가 4불가론을 할 때, 마지막에 [[왜적]]의 얼굴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상화를 가져다 썼다. 물론 시즌2의 [[임진왜란]] 때 고니시도 같은 얼굴을 썼다. 이를 볼 때는 설마 초상화의 주인을 몰랐을 리는 없고 아마 한국인들에게 임진왜란으로 잘 알려진 일본인중 한명이니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여말선초]]의 왜적들은 쇼니 가문, [[시마즈]] 가문들로 추측하는게 대세인데 왜 굳이 고니시를 썼는지 의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