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용대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_NIaY5Mu9U)]}}}|| || 1940년 [[중국국민당]] 산하 중국신문(中國新聞)이 제작한 조선의용대 홍보 영상. [[https://modern_history.kbs.co.kr/archive/userrecordimage/recordImageView.do?idnbr=2023006233#|원본]] ||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좌익단체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만든 연합성격의 항일민족연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후베이성]] [[우한|한커우]][* 현재의 [[우한|우한]](武漢)이다.]에서 창설한 관내 지역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부터 40년대까지 관내지역 국민당 관할지역과 적구 지역에서 국민혁명군과 함께 군사활동을 벌인다. 조선의용대의 항일활동은 대체로 무한시기, 계림시기, 중경시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시기 중경으로 본부를 옮긴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부터 6월까지 낙양에 결집했던 제1,3 혼성부대와 전위동맹 계열 제2지대가 무장항일전선 활동을 위해 화북지역으로 넘어간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달리 학계에선 조선의용대는 분열한 것이 아닌 의도를 가지고 이르면 39년부터 조선의용대 중추세력부터 화북지역 진출을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있음에 동의하고 있다.] 무장활동을 위한 주력부대는 국민당 정부 관할 지역을 벗어나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활동하고 있는 태항산 일대로 넘어갔다. 이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르며 1942년 7월 이후 조선독립동맹 산하 당군이 되기 전까지 주체적 성격을 띠며 조선의용대의 분대 역할을 수행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독립동맹]]'이 결성에 모체가 되며, 북한 [[연안파]]의 뿌리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고 국공내전에서 팔로군의 중국 공산화 승리의 일익을 담당하여 그 공으로 조선족 자치구를 하사받았고 이후 이이제이로 북한에 보내져 인민군을 창설하고 남침의 선봉이 되었으며 대표적 주력부대는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있으며 조선의용대의 구대장을 역임했던 박효삼이 인민군 9사단장으로 남침의 선봉을 선다. 이후 통일 직전에 중공군의 참전 및 한반도 점령 시도의 길잡이로서 조선족 성인 남자는 대부분 투입되어 많은 기여를 했다. 휴전 이후에는 조선족 자치구는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으며 조선족 마을에서는 매년 이를 항미원조로 기념행사를 한다.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이후 김원봉 휘하 조선의용대 대본부와 각 지대 잔존 병력 50여명의 병력은 국민당의 지원 문제와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일원화 움직임에 따른 입지의 불리함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일전쟁 상황과 함께 세계정세의 급변화로 인해 불관용 원칙을 고수하던 기존의 입장을 벗어던지고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관내지역에 존재하는 조선의용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재편성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