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용대 (문단 편집) == 창설 == 일본인 반전 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 [[1933년]] 5월에는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에 참가하였다. [[1934년]]에 검거되었으나, 전향을 강요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출옥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에 [[중화민국]]의 [[상하이시]]로 망명하였으며, 상하이 함락 후에는 [[홍콩]]과 [[베트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무한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폭로하는데 참여했다.]가 조선 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봉생, 정치 부장 진성, 부부장 [[저우언라이]]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 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포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혁명군|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제스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 의용대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 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훗날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을 때 이 전력 때문에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국민당군과 연합 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전 대원이 장교급 교육을 받은 고급 병력인 점을 활용하여 국민혁명군과 함께 연합활동을 했으며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 포로 심문, 전장교란, 문서번역, 격문살포, 전투보조 역할 등을 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