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용대 (문단 편집) === 화북 이동과 조선 의용군 ===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김원봉이 임명한 제1,3 혼성지대 지대장 [[박효삼]]과 민족혁명당 계열 간부들의 인솔하에 북상했다. 이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이미 연안에 자리하고 있던 화북조선독립동맹원 인도 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관할 구역 태항산으로 향하게 된다.(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 이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군의 주력부대가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었다.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 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8년 3월 15일 기준. 제1연대 1,301명 제2연대 1,709명 제3연대 1,608명 등을 포함하여 총 인원 8,274명. (출처: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염인호,1994) ][* 일제 패망할 당시에는 1,000명 정도 (출처: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 김광재, 2006)]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그 외 재미 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 군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 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 단체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했을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 조선 의용군은 화베이 지역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팔로군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선전⋅첩보활동을 했다. 또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일깨우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민중의 팔로군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열어 군사⋅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간부를 양성했고, 척박한 토지에 밭을 일궈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생산 활동도 전개했다. 1943년 6월에는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 산 곳곳에서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반격을 전개해 용맹을 떨쳤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5072309030037100_P2.jpg]] [[파일:2778.jpg]]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데, 첫번째는 '[[일본군|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 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이고, 두번째는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강제병]]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오' 라는 내용이다.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조선 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옌안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옌안 근교 뤄자핑에 머물렀다. 조선 의용군은 1944년부터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또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연안 조선군사정치학교(교장 김두봉, 부교장 박일우, 학도대장 박효삼) 등을 개교하여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5년 5월에는 그 수가 총 850여 명에 달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 상당수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으며,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국공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9년 5월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의 귀국 요청을 허가하였고, 1949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50,000여명 규모의 중공군 소속 조선인이 북한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한인 부대일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연안파 세력은 모두 몰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