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인민공화국 (문단 편집) == 배경 ==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조선총독|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던 사람이고, 일제가 최후로 가파르게 넘어가던 1944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음에도 조선인들을 총칼로 억누르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해서 저질렀다.[* [[일본제국|일본 정부]]가 [[무조건항복]]을 하기 전까지 일본이 내건 종전 조건 중 하나가 조선의 식민지 영유권 유지였다. 따라서 1944년에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가 받은 지령은 조선의 치안력 유지였을 확률이 높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유권유지 망상은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대일선전포고]]으로 인하여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소일전쟁|선전포고]]하고 내려오자, 조선이 연합국에 넘어갈 것을 직감하고, 일본인들이 무자비한 공산군의 포로로 잡히게 두느니[* 여운형과 초기 협상을 완료했을 때는 이미 소련이 [[청진시|청진]]을 점령하고 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소련치하 일본인들의 운명이 상당히 가혹했다는 것을 보면 이 생각은 일본인들을 지키기 위한 매우 옳은 생각이었다.], 힘없는 조선인들과 협상해서 그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하에 [[여운형]]을 불러서 일본인들의 무사귀국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 이처럼 큰 위기가 다가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킬 필요가 생겼을 때, 조선인들 또한 서서히 긴장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국내외의 조선인 유력자들은 일제의 패망이 필연적이며, 그 필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선인 유력자들은 연합국이 들어오기 전에 그들과 협상할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어야만 주권국가로서 그들과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고 있었고[* 1차대전 식민지들은 명목상 [[국제연맹]]에 의하여 신탁통치를 받은 뒤, 일정기간 후 독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독립한 것은 제국에 지배당하던 유럽인들 뿐. 대부분의 패전국 식민지들은 승전국의 식민지로 재편입되었다.], 조선이 독립할 철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정부조직과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일제의 지배층과 조선인 유력자들의 이해관계가 어느정도 맞게 된 무렵, [[아베 노부유키]]가 [[여운형]]을 부른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인의 나라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제가 패전시국에 조선인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실제로 총독부는 일본인들의 안전한 철수만 고려했지 해방될 조선인들을 배려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증거로 귀국자금을 얻기 위해서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서 얼마 없는 조선인 자본을 망가뜨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파괴했다.], 다소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더라도 일제가 헛짓을 못하도록 막겠다는 일념으로 협상에 임했다. 아베 노부유키와의 협상 결과로,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각 석방할 것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등의 결과를 창출해냈는데, 악독한 아베 노부유키는 무력을 넘기지 않은 이렇게나 불합리한 협상조차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엔도 류사쿠]] 총감이 아베 노부유키를 설득해서 협상을 조인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협상이 체결되었다. 총독부와 조선인 유력자들의 협상이 체결되자,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발족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하였다.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건준이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안전한 귀국을 위해 조선인들의 활동을 묵인한 총독부 덕에 조선인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을 위한 공식적인 정치조직이 [[경술국치]] 이후, 최초로 설립된 순간이었다. 건준은 이미 이북에 들어온 소련과 협상하여 건국준비활동을 보장받았고, 소련도 일제의 공업시설과 일본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에 관심을 갖느라, 조선인들의 정치활동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건준을 방해할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조선이 연합국에 의해서 그냥 독립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김일성이 소련과 함께 들어왔지만 딱히 이들로 뭔가 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과 소련간에 갈등이 시작된 이후에 바뀐다.] 소련의 건준조직 인정에 힘입어, 건준은 연합국이 자신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미 조선인들에게 정통 조직[* 좌익들은 임정에 큰 애착이 없었지만 특히 우익은 임정의 정통성을 높게 봤다.]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건준의 좌익 색채로 인해 우익들의 큰 지지를 못 받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좌익들 사이도 여러 파벌로 갈라져 있어서 단결이 쉽지 않았다. 특히 귀국하지 못한 임시정부를 무시하기 힘들었기에 8월 초에 총독부와 협상을 마쳤음에도 조선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설립일인 9월 6일까지도 총선이라든지 헌법제정이라든지라는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헌법제정도 제헌의회 출범도 결국 해산되는 순간까지 하지 못했다.] 결국, 임시정부의 귀국이 늦어지는 가운데 미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압박감에 '''9월 6일'''에 헌법도 제헌의회도 명백한 중앙관료조직과 군대도 없이 졸속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설립하게 된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설립되는 순간까지도 군대와 경찰조직은 일제의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고(38선 이북은 소련이 가져갔다), 중앙정부 좌석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여러 조직에 공정히 배분한다고 상당수가 비어있었으며, 총독부치하의 관료조직은 월급을 주는 총독부의 영향력 내에서 계속 보신[* 다만 총독부의 관료조직과 별개로 각 지방은 조선인의 자치조직이 구성되고 있었으며 조선인 관료들은 이에 어느정도 협력하고 있었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