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인민군 (문단 편집) === 직접적인 참전 === * [[베트남 전쟁]] 조선인민군 첫 참전 전쟁으로 [[북베트남]]을 소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북한의 슬로건은 '월남(베트남)에서 [[미군]]이 100명 죽으면 남조선에 있는 미군이 100명 죽는 것이나 같으므로 [[베트콩]]을 도와주어야 한다'였다. 1967년에는 전투기 조종사,[* 비행 연대 2개] 1972년에는 [[공작원]]을 베트남에 파견해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였다. 기타 수송병, 화학병, 공병 등의 형태로 소규모 참전하였다. 북베트남은 훗날 조선인민군이 요구한 서방진영 군수품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은 중국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때 친중국 정책을 취하던 북한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다만 [[F-5]]와 [[A-37]] 등의 공군 항공기와 [[M48]] 전차, M16 소총 등 각종 육군 무기가 북베트남군에 노획되었고, 이 중 일부는 공산국가로 흘러들어간 점 등을 봤을 때[* M16 소총은 입수 루트가 워낙 다양하긴 하지만 북한도 상당량을 가지고 있다. 국군으로 위장해 침투했다가 703 연대와 조우했을 때 위장한 부대가 갖고 있지 않은 M16으로 무장했던 탓에 공비라는 것이 들통나 실패했던 적도 있을 정도다.] 소량이라도 노획품을 제공했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북베트남에게 인계받은 F-5와 A-37을 국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96년에 귀순한 조선인민군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F-5를 조종한 선임을 맞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지원 말고도 심리전 요원 등이 활동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 [[제4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에 미사일 요원 30명과 전투기 조종사 및 정비사 50명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사람 중 하나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당시 대좌). 이때 북한 조종사와 군사고문단들은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군 사령관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대통령이 된 후 은혜를 갚기 위해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를 끝까지 지켜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해인 95년 수교 협정에 서명한다. * [[시리아 내전]] 다수의 특수부대원과 군사고문단, 기갑 승무원들이 파병되어 있다. 일부는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바샤르 알 아사드]]의 군대 편을 들고 있다. * [[기타]] 비동맹회의에 가입한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 80년대부터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리비아]]에도 북한의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다. 프란스 알버트 레네 대통령 치하의 세이셸에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동남아시아 [[브루나이]]와 [[캄보디아]]에서 저격여단 요원들이 경호 업무를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