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일보 (문단 편집) == 인지도 == 2021년도 한국 ABC협회 유료부수 통계에서도 2위 동아일보와 상당한 격차를 벌린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 각 지역별로도 [[부산일보]]가 1위인 [[부산광역시]]와 [[매일신문]]이 1위인 [[대구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시도 지역에서 일간지 유료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부산과 대구에서도 조선일보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후술된 내용이나 [[신문]] 항목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렇게 알려진 유료부수나 발행부수의 대부분이 뻥튀기 부수인 것은 이미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물론 업계 모든 회사들이 뻥튀기 부수이기 대문에 상대적인 순위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절대적인 부수 규모 자체는 알려진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일례로 2018년도에 신문 업계 관계자가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4475|'''"조선일보 유료부수는 100만이 무너졌고, 동아일보는 실제 유료부수와 ABC협회 공사결과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게 업계 시각"''']]이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2022년에는 조선일보를 판매하는 수도권 신문 지국장이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043|'''"조선일보 유료부수 55만부 줄 거 아니면, ABC협회는 부수인증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2021년 ABC 협회 발표 기준으로 보면 조선일보의 유료부수는 100만부가 넘는다. 그러나 정작 조선일보를 직접 판매하는 지국장은 '조선일보의 실제 유료부수는 외부에 알려진 것의 반 밖에 안된다'는 취지의 증언을 하는 형편인 것.] 어쨌든 1970년대 말 발행부수 1위를 기록한 이래로 줄곧 발행부수나 유료부수가 제일 많으며[* 한국 ABC 협회 기준 2021년(2020년 조사) 유료부수가 100만 부로써 23개 신문사 중 1위인데, ABC 협회의 부수 공시가 허위 부풀리기 공시임을 감안해도 최근 몇 년간 유료부수 수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양상이 눈에 띈다.], 따라서 적어도 신문사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매체 영향력을 발휘하는 언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스스로 '1등 신문'임을 내세운다. 물론 200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신문 자체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매체로서의 신문 영향력 또한 급격히 쪼그라드는 세상이 된 터라 과거처럼 '신문 중의 영향력 1위'가 더이상 '언론 중의 1위'가 아니게 되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언론수용자 조사'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모든 매체를 통들어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모두에서 줄곧 3위 안에 꼽혔으나, 2020년 현재 통계 기준으로 보면 여러 지상파 채널 및 종편과 포털 사이트에 밀려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순위 모두에서 10위로 추락했다.[* 과거에는 '신문사 기자가 진짜 기자이지, 방송사 기자는 기자도 아니다'는 말이 언론계에서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방송의 영향력이 신문을 압도한 지가 한참 오래되었고, 기자 지망생들 조차 기왕이면 방송사 기자를 하려고 하지 굳이 신문사 기자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 한때는 '중앙 일간지 소속 기자'라는 명함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조중동]]에 합격한 신입 수습기자들이 방송사에서 동시에 합격 연락이 오면 죄다 신문사를 버리고 냉큼 방송사로 달려가는 분위기가 정착된 지 이미 오래이다.] [[박정희]]의 집권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같은 독보적인 1등 신문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정부]]와 깊게 결탁하는 한편[* 1960년대 후반,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을 지을 때 일본으로부터 약 400만 달러에 달하는 상업차관을 들여온 사건이 있었다. 당시 400만 달러라면 굉장히 큰 돈이었는데, 시중 은행의 금리가 연 26%일 때, 조선일보가 부담한 금리는 겨우 7%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조선일보에 엄청난 특혜를 준 것이다.],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하나회]] 일당의 [[12.12 쿠데타]]였다. 이후 [[전두환]] [[신군부]]에 적극 영합하면서 피해를 보지 않았고[* 언론통폐합의 설계자인 [[허문도]]가 조선일보 출신이었던 덕을 보았다. 또한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다르게, 조선일보는 [[지상파]] 및 [[라디오]] 방송을 운영하지 않은 상태였던 터라 방송사를 빼앗길 꺼리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은 전두환이 집권을 위해 만든 초법적 통치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입법위원으로 참여하며 노골적으로 결탁했을 정도였으며, 특히 전두환이 집권을 눈앞에 두었던 시기인 8월 23일에는 그 유명한 ''''인간 전두환 - [[육군사관학교|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와 행동''''이라는 [[용비어천가]]급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00823002391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8-23&officeId=00023&pageNo=3&printNo=18270&publishType=00010|특집 기사]]를 쓰며 전두환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전력을 쏟았다. 원래 이 기사는 조선일보의 기사 라이브러리에서 [[환상의 에피소드|아주 오랫동안 삭제되어 있었는데]], 창간 100주년 기념으로 조선일보가 자체 아카이브를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으로 개편하면서 비로소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몇몇 언론 비평 매체 기자, 또는 언론학을 연구하던 연구자들이 직접 [[국회도서관]]에 가서 해당 기사에 대한 마이크로 필름을 열람한 후 썼던 분석 기사, 논문, 언론비평 서적 등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다. 또한 조선일보가 1980년대에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언론통폐합]]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주요 경쟁지인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방송사인 [[동아방송(라디오)|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을 [[KBS]]에게 강제로 헌납했고 한국일보 역시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의 사업을 접어야하는 등 모두 언론통폐합으로 엄청난 재산을 뺏긴 반면, 조선일보는 일부 개혁 성향의 기자들만 해직시키는 선에서 처리했고, [[전두환 정부]]에 깊이 참여하여 지속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전성기는 1990년대로 꼽을 수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으로 언론 자유화가 되고 지면 제한이 없어지자 의욕적인 확장에 나서서 발행 부수가 200만 부를 넘겼고[* 여기서 감안할 점은 온갖 사은품에 전단지 수준으로 뿌려대서 유료부수 규모의 거품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실상 대한민국 신문들은 진보-보수나 좌우파를 떠나, 사실상 구독료 수입이 아닌 기업 광고료 수입으로 먹고 살다보니, 각종 사은품은 물론이고 1년치 구독료 공짜 서비스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마구 무가지를 뿌려대는 수준이다. 이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대형 족벌 언론이나, [[매일경제신문]]이나 [[한국경제신문]] 같은 경제신문들이 특히 심각하다.], 보수 정치권이나 경제계와 결탁하여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편, 당시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미디어 광고 시장의 수혜도 톡톡히 누렸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는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비토해서 '反 DJ 정서'를 고착시키는 한편, 1990년 [[3당 합당]]과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편들어 준 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매체 영향력을 입증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의 논조는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 관련 보도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심지어 정치 권력을 옹립하는 기능으로써의 거대 언론 권력이 최초로 부각된 사례가 김영삼 정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이었다는 분석이 이후 언론학계에서 나올 정도였다.[* 조선일보는 민주화 이후로도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논조를 보여왔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내놓았지만, 김영삼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김영삼은 언론을 대하는 데 능숙했고, 또 그가 이끄는 [[상도동계]]는 민주화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와 유사한 보수 우파 성향을 가진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덕분인지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바로 다음날 서울 흑석동에 있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가졌던 막강한 권력을 보여준 단적인 장면이었다.[* 사실 언론들이 자신의 성향에 따라 특정 세력과 결탁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밀어주는 건 다른 언론들도 비슷한 처지이다. 말하자면 [[조중동]]은 전통적인 [[보수정당]] 세력을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한겨레]]나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민주당계 정당]]을 의식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비민주당계 [[대한민국 진보정당|진보정당]]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보수 진영 유권자들이 '아니, [[한경오]]는 민주당이랑 [[깐부]]먹은 애들 아니야?'라고 아직 많이들 오해하곤 하는데,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의 진보 언론 소속의 기자들은 선거나 정치적 사건, 정책 등에서 [[대한민국 진보정당|진보정당]] 계열을 지지하지,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거기에다가 이 시기는 언론 통제도 누그러질 때라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도 덤이었다. 물론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도 같이 200만부를 넘겼기 때문에 혼자 독주를 하지는 못했지만[* 전통적으로 볼 때, 조선일보는 반공주의와 안보 체제를 내세우는 '이념 보수',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계열 언론라는 태생적 특성에 기인한 탓에 경제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걷는 '시장 보수', 동아일보는 상대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을 밀어주는 개혁 성향의 신문으로 분류되곤 했다. 다만 [[중앙일보]]는 언론 통폐합의 영향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정책에 부정적인 스텐스를 보이긴 했으며, 한편 [[동아일보]]는 2000년 즈음을 기점으로 완연한 보수 언론으로 변모하여,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른바 [[조중동]] 체제가 완성된다. 한편 [[한국일보]]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러 논조와 색채가 뒤섞인 신문이었다.], 어쨌든 영향력으로나 매출액으로나 이때 만큼의 전성기는 없었다. 사실 이 전성기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능력있는 기자들을 많이 보유했던 것과는 별개로 오보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어쨌든 시간이 훌러 1997년 대선에서도 조선일보는 [[이회창]]과 [[이인제]]를 놓고 이회창을 선택했고, 한동안 이인제가 승승장구해서 지지율이 이회창을 크게 앞섰을 때에도 중앙일보와 합작해서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지만[* 일례로 1997년 당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조선일보 사옥 근처에서 조선일보의 편파 보도에 관해 항의 시위를 하는 [[새정치국민회의]]와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 선거 운동원들을 향해 조선일보의 [[김대중(기자)|김대중]] 주필이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손가락질을 하며 "국민회의, 국민신당. 까불지 마. 내일 모레면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라며 주정을 부렸던 사건은 유명하다.], [[IMF 외환위기]]가 한창 닥쳐왔던 때라서 표 분산을 완전히 막지 못한 채로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발행부수가 200만부를 여전히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기에 [[국민의 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비토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2001년부터는 [[동아일보]]도 보수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이른바 [[조중동]] 3사가 전부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총재이자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밀어주는 스탠스가 되었다. [[조중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널리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에는 발행부수가 248만 부에 달했고,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후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면서[* 정말 별볼일 없는 일로도 참여정부를 까댔다. 물론 보수층들에게는 잘 먹혔으며 진보언론도 참여정부를 깠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효과는 배가 되었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을 하락시켰으며,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이후로는 [[박근혜]]를 밀어주면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종편 출범 이후부터는 [[TV조선]]도 50대 이상 보수층에게 꽤나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여전히 종이신문 자체 발행부수에 비해 보수층에서 만큼은 높은 매체 영향력을 행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