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족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 이후 === >셋째, 1958~1978년 시기에 조선족의 정체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규정되도록 강요받게 되었으며, 중국의 조선족과 한반도의 한인과 구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심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문화혁명(1966~1976)의 초기에 더욱 심하였고 일체의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는 표현은 쓰지 못했다. 특히 계급 대오 정리운동기간(1968~1969)에는 많은 조선족이 민족 문제로 희생한다. 또 민족문화도 큰 수난을 당했는데 연변일보는 신화사전신으로 개명되어 한자로 출간하였고 '''연변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 대신 중국어로 강의했다.''' > "국내 거주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 형성과 변화 연구," 김영술 (동북아연구, 2019))[[https://oak.chosun.ac.kr/bitstream/2020.oak/16066/1/%EA%B5%AD%EB%82%B4%20%EA%B1%B0%EC%A3%BC%20%EC%A1%B0%EC%84%A0%EC%A1%B1%EC%9D%98%20%EB%AF%BC%EC%A1%B1%20%EC%A0%95%EC%B2%B4%EC%84%B1%EA%B3%BC%20%EA%B5%AD%EA%B0%80%20%EC%A0%95%EC%B2%B4%EC%84%B1%20%ED%98%95%EC%84%B1%EA%B3%BC%20%EB%B3%80%ED%99%94%20%EC%97%B0%EA%B5%AC.pdf|#]] '''그러나 [[문화혁명]]을 기준으로 모든게 달라졌다.''' 조선인의 인구유출은 뜻밖에도 [[한족]]의 국가인 중국에서 막는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이를 피하려는 사람을 반혁명으로 몰았는데 조선인이 문화대혁명을 피해서 북한으로 도피하려 하자[*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중국에 비해 오히려 정상적인 나라였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이 중국을 앞섰는데, 중국이 북한의 GDP를 1994년 앞선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도피하는 사람을 [[간첩|조선간첩]]으로 몰아서 감옥에 넣고 제재를 가했다.''' 때문에 조선인의 북한귀국행렬은 멈춘다. 결국 중국당국의 눈을 피해서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중국에 눌러 앉게 되었는데, 이들이 현재의 조선족이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한민족과 둥베이 3성의 중국조선족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조선족의 정신구조 자체를 바꿔버렸는데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의 출신성분에 대한 기록, 가령 족보같은 것을 모두 소각하거나 폐기했으며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의 정신을 개조한다. 예로 [[문화대혁명]]이 벌어지기 전의 조선족은 자신이 유래한 지역을 알고 있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내 고향은 남쪽 ㅁㅁ지역이오"라는 식으로 답변했는데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인은 자신을 중국의 항일전쟁에 피흘려 싸운 급부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강렬하고 뚜렷한 민족관과 조국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개조 이후에는 "우리는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북한]]과도 결별하여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조는 [[4인방]]의 한 명이었던 [[장칭]]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장칭]]이 파견한 마오위안신(毛遠新)[*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신강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은 [[장칭]]의 뜻을 받잡아 조선족을 족치기 시작했다.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에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의 조선족에 다시 한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면서 민족의식이 있는 조선인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의 간첩 등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이는 계급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주더하이)가 있고, 그 외의 조선인 주장과 서기들은 [[분리주의]]지로 몰아가 실각시키고 죽였으며, 조선의 역사와 말과 글을 가르치던 조선인 교사들을 홍위병으로 끌어내 조림돌림하며 자아비판을 시켰다. 이러한 조선족에 대한 박해행위는 단순하게 현장의 조선인 관리들을 욕보인 것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를 격하하고 그들의 유물을 파괴했다. 사람을 짓이긴 후에는 조선인의 문화 또한 파괴하려 들었는데, [[평양냉면]], [[함흥냉면]], '[[인천]]백반' 같이 조선땅의 지명이 붙은 음식점을 파괴했고, 조선인들의 사진[* [[한복]]을 입은 사진이 나오면 처벌했다.]과 족보[* 족보의 경우, 이것을 발견하는 즉시 반혁명분자 내지 지주/유학자계급으로 분류하여 극형을 내리기도 했다.]는 물론 조선어로 쓴 책이나 편지를 검열하여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 때에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자료가 상당수 유실'''되어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수많은 기록이 사라졌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기록조차 4인방과 마오위안신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조선족에 대한 박해 및 정신개조사업이 잊혀질 뻔했다. 하지만 황영림이라는 조선족 사진사가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어 관련된 사진자료를 남겼고, 이를 한국인 류은규가 엮어서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이란 이름의 책으로 2010년에 출간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제목에 '10년의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사연이 있는데,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가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시]](룽징)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황영림이 류은규에게 사진을 줄 때,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던 것이다. 이것이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 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보고싶은 사람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을 보길 권장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5394.htm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810100055|#]] '''단, 2022년 기준으로 절판되어 구할수 없으므로 도서관을 이용할 것.''' 이러한 조선족들의 고초는 조선인의 [[민족주의|민족정신]]와 함께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화대혁명 이후에 조선족이 [[한족]]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도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조선족은 [[항일전쟁]]에 함께한 민족으로서 꽤나 대접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북한인과 처지가 180도 바뀌어서 이제는 북한사람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 방향으로 [[탈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북한으로 탈출했던 친척을 중국에 남은 사람(조선족)이 도와주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후 개혁개방이 이루어지자 조선족의 교류대상은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문화대혁명]]이전에 많은 조선족이 [[북한]]에 넘어갔듯이, 현재는 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다만 그 시절과 다르게 현재의 조선족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한국에 영구정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외화([[원화]], [[미국 달러|달러]])를 벌어서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앞잡이나 [[보이스피싱|범죄자집단]]이란 편견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조선족의 해외 진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1980년대 후반 이주하기 시작한 국내 조선족은 2022년 현재 70만 명이다. 1980년대 중·후반 조선족은 한국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정부의 간단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약재를 가지고 입국하여 큰돈을 벌면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 코리안 드림의 불을 지폈다. 1990년대 초반 불법체류자들이 늘어나면서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국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합법적 입국통로가 좁아지면서 새로운 입국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조선족 여성의 한국남성과의 혼인을 통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족 남성들은 대부분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여성은 식당, 가사도우미와 같은 서비스직 노동자로 일한다. 그들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선, 한국 노동시장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와 중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한국의 임금 수준이다. 또 중국의 개혁, 개방 이래로 조선족의 지위상승 열망과 중국 내 중앙 진출의 기회 제약의 상황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은 재외동포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여 불법체류자를 양산했다. 조선족노동자들의 집단행동과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에 따라 최근에는 방문취업을 5년간 복수로 허용하고, 재일동포 비자는 3년의 체류기간을 주고 있고, 2010년에는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 간병인, 복지시설보조원 등의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22년 현재는 2020년에 [[중국]]의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하여 조선족은 [[한국]]과도 [[북한]]과도 교류가 줄고 있는 실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