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해안경비대 (문단 편집) == 해방병단 ==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6월 15일에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이라고 불렸다. 사실 해군사에서 중요한 단체는 바로 이 해방병단이다. [[손원일]] 제독과 윤치창이 함께 설립한 해사대(海事隊)와 석은태 대표가 단장으로 있던 '조선해사보국단'을 합친 '조선해사협회'가 [[1945년]] 11월 11일 [[미 군정]]과의 합의[* 1945년 11월 미 군정청의 운수부장인 칼스텐 육군 [[소령]]이 일본 해군의 항구가 있던 [[경상남도]] [[진해구|진해]]의 해안 및 도서 순찰을 맡을 인원을 민간에 요청했다. 일종의 [[아웃소싱]]이었던 것.]를 통하여 [[상선사관]][* [[일본 해군]]은 순혈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일본인]]을 제외한 식민지인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본해군병학교]]는 종전 시까지 [[식민지]] 출신과 [[외국인]] 생도를 일체 받지 않았기에 여기서 타국인이 [[장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수병]]에 한하여 1943년부터 조선인 지원자를 모집하기는 했으나, 이마저도 사보타주 등의 공작을 우려해 육상부대 위주로 배치했다. [[만주군]]과 [[국부군]]의 해군은 영 부실했고, [[광복군]] 등의 독립군에는 해군 자체가 없었다.][* 해군에 일본군과 만주군 경력자가 유입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육군 및 육전대 출신들이었기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자 그쪽으로 다 전출갔다. 함정 운용에는 도움이 안되어도 상륙전 등의 지상전에는 익숙했으므로 이는 합리적인 인사였다. 그래서 해군은 국군 중 유일하게 정통성 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들을 중심으로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해방병단은 [[일본군]]이 남긴 시설을 인수하고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들을 수리해 재취역시켰다. 그리고 인원을 1,000명 가량 확보했으며, 이들은 국내 해안과 도서의 경비를 맡았다. 당시 미 군정은 국내에 난립하던 무장단체를 모두 해산시켰는데, 해방병단은 예외였다. 육군계 무장단체들이 미 군정청의 인정을 일절 받지 못했기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에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