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성민 (문단 편집) === 한국 무대 복귀 === 조성민은 한국 복귀 후에도 야구선수로 계속 활약하기를 원했다. 본인의 회고로는 이 당시 미국 무대에 가고 싶었다고 하며, 퇴단 이후 미국에서 재활에 전념하고 싶다는 인터뷰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8/23/2002082370221.html|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미 틀어지기 시작한 사생활 문제탓인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일단 규정상으론 조성민은 1999년 이전에 해외로 건너간 케이스라서 '한국 리그를 거치지 않고 해외 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국내로 돌아올 경우 2년간의 유예기간이 적용되어 국내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은데다가, 고교 및 대학시절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은 적도 없어서 표면적으로는 리턴 후 곧바로 한국에서 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팀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고교졸업 당시 연고팀이던 LG와 두산의 1차 지명도 가능한 상황.[* 1997년 신일고 중퇴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7년 LG의 1차 지명을 받고 돌아온 [[봉중근]]이 이 케이스였다. 게다가 2000년에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LG에서 1차 지명을 받은 최경환이라는 선례도 있었고.] 그래서 본인은 내심 상위권 지명을 통해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화려하게 국내무대로 복귀하려던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이미 20대 초반의 팔팔하던 신인 선수가 아닌, 팔꿈치 수술만 두 번을 받고 경쟁력을 상실해버린 30대 초반의 전직 야구선수였다는 것이다. 이 상태의 조성민을 영입하기 위해 상위 지명권을 사용할 팀은 없었다. 또한 퇴단 합의시기가 늦어 복귀 이듬해 바로 뛸 수 없었다는 부분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2003년 드래프트는 2002년 6-7월에 완료되었다.) 게다가 이 시점은 이미 후술할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뒤의 시점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좋았어도 공백기와 나이 때문에 상위 지명이 부담스러울 판에 기량 자체가 물음표인데다 사생활 문제까지 있는 선수를 지명권까지 써가며 영입할 팀은 없었다. 아무튼 2003년 4월에 조성민은 [[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2004년 신인지명]]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1차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LG와 두산은 그를 외면하였고[* 이 때 LG 트윈스는 사이드암 투수 장진용을, 두산 베어스는 내야수 김재호를 지명헀다. ], 2차 지명에서도 참가했으나 1라운드에서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자리를 뜨고 만다. 자존심을 버리고 하위 지명이나 신고선수로 입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예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이를 거절해버린 것이다. 1년 뒤인 2004년, 즉 [[한국프로야구/2005년/신인드래프트|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도 모든 구단에게서 외면받는 비슷한 모습을 반복했는데, 이때는 이미 후술할 명예훼손 시도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뒤였는데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라는 쓸데없는 발언을 해서 더더욱 까였다.[* 참고로 [[한국프로야구/2005년/신인드래프트|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최정]], [[박병호]], [[윤석민(투수)|윤석민]], [[오승환]], [[정근우]]''' 등이 지명받았다. 이 선수들의 활약상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여기에 적어봤자 손가락만 아프니 넘어가기로 한다]]'''. 이외에도 [[오재일]], [[이원석(1986)|이원석]], [[조정훈(야구선수)|조정훈]], [[진해수]], [[이보근]], [[전유수]], [[박정배]] 등등 야구 좀 보는 팬들이면 다 아는 선수들이 해당 년도 드래프트에서 배출되었다. 가히 '''황금기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국내 복귀를 결심했으면 착실히 몸을 만들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면 [[KBO 리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리그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해볼 마지막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이후에는 개인 사업에 전념했다. 사실 선수 복귀가 불발됐다고 부랴부랴 급조한 사업은 아니고, 요미우리 소속이던 2002년에 부부의 성을 딴 "C&C 컴퍼니"를 세우며 이미 사업가 변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첫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던 시절 좋아했던 [[슈크림]] 브랜드 '비어드 파파'[* Beard papa. "수염난 아빠"란 뜻이다. 동네 빵집에서 파는 베이비 슈보다 크기가 크고, 크림 종류도 다양하다.]를 국내에 보급하려 했고 실제로 한국 내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따낸 뒤 2002년 8월 목동에 1호점을 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신통치 않았고 법적 분쟁까지 겹치며 대차게 말아먹었다. 일단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 게 문제였고, 하술될 조성민의 막장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사업도 말아먹고 [[사기]]까지 당하고는 빚만 100억대를 지다가 [[이호성 살인 사건|흉악범으로 전락해]] 자살하는 등 훨씬 더 비참하게 몰락한 [[이호성]]보다는 양반이다.] 참고로 해당 브랜드의 운영권은 2004년에 [[코오롱그룹]] 계열사 스위트밀이 넘겨받아 이후에도 곳곳에서 매장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에는 당시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영입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현역 복귀도 완전히 물건너가나 싶었지만, 당시 한화 경기를 중계하러 갔다가 만난 [[김인식]](당시 한화 감독)의 권유로 한화 이글스 입단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