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성자 (문단 편집) === 유랑 이후 === 진문공 원년(기원전 635년), 조최가 진문공에게 패자가 되기 위해 [[주나라|주(周)나라]] 왕실을 보좌하라고 했다. 4월에 진 문공이 [[양왕(주)|주양왕]](周襄王)의 아우 왕자 대(王子帶)를 죽이는 공로를 세우자 주 양왕은 진 문공에게 하내와 양읍 땅을 하사했다. 진문공 3년(기원전 633년), 진문공이 삼군을 편성하자 조최가 극곡(郤縠)을 중군 원수로 추대했고, 극진(郤臻)에게 그를 보좌하게 했다. 호모를 상군장, 호언을 상군좌[* 호언을 상군장, 호모를 상군좌로 임명하려 했으나 호언이 호모가 연장자이기에 그를 상군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양보해서 둘의 직위가 바뀌었다.], 난지(欒枝)는 하군장, 선진은 하군좌로 임명했다. 그리고 순림보(荀林父)가 융거를 몰고, [[위무자|위주]]는 융우가 되었다. 이듬해 [[조나라#s-2|조(曹)나라]]와 [[위(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를 정벌했다. 진문공 4년(기원전 632년), 진문공은 조최와 함께 천토의 회맹에 참여했다. 진문공 7년(기원전 629년), 진문공은 신상군, 신하군을 두어 조최를 신하군장으로 임명했다. 진문공 8년(기원전 628년), 호언이 죽자 그를 대신해 상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진문공이 서거했다. 진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중군 원수 선진이 전사해 선저거(先且居)가 원수가 되었고, 조최는 중군좌가 되었다. 진양공 3년(기원전 625년), 조최는 선저거와 함께 팽어 전투에 참여했다. 진양공 6년(기원전 622년), 조최가 죽고 성계(成季)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조돈이 후계를 이었다. [각주] [[분류:조나라의 군주]][[분류:기원전 622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