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승훈 (문단 편집) == 생애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의 장군. 직급은 명 요양 부총병이었다. [[조선]]에서는 '''조 총병'''이라고 [[인플레이션|한 직급 높여 불렀다.]] 만력 10년(1582년), [[요동]]부총병이 되었으며, 좌군도독에 오른다. 이후 몽고와 만주의 여러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심양에 주둔했다. 1584년 몽고인 300여기가 요서로 침입하자 조승훈은 이에 대응하여 수십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선은 명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승훈은 조선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주둔한 부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선발대로 파병된다. > “귀국은 중국에 있어서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는 나라로서 [[운남]](雲南)이나 [[산시성(섬서성)|섬서]](陝西)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병마(兵馬)가 오래 머무는 동안 장수들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한결같지 않았고, 이제 철수하여 돌아갈 때도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32년(1599년 기해 / 명 [[만력제]](萬曆) 27년) 2월 9일 1번째 기사 선발대로 [[조선]]에 지원을 왔으나, 이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잘 모르고 있었으며 [[왜군]]이 얼마나 강한지도 잘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조선]]조차 허접한 군사 활동 때문에 심각성을 몰랐다. 조선이 명에게 [[평양성]]에 있는 [[왜군]]의 규모를 2천명 정도라고 알려주었다. 당연히 그 정보를 믿은 조승훈이 "5천명으로 함락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다가 처참히 깨진 거다. 당연히 [[명나라]]에서 "[[왜군]] 병력수를 왜 속이는가? 조승훈 말로는 2천명이 아니라던데? 진짜 왜군하고 손잡고 우리 나라 공격할 생각 아닌가?"라고 항의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조선 측에서 "저희 쪽 첩보 활동으로는 왜군 병력 적다고 해서 그렇게 알려드렸는데 저희가 잘못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해야만 했다. 이후 [[평양성]]의 병력은 [[심유경]]이 일시 강화 협상을 맺고 난 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곧 겨울이 오니 털모자를 선물해주겠다"는 전령을 보내 "털모자 15,000개가 필요하다"는 고니시의 답변으로 [[평양성]] 주둔 [[왜군]] 숫자를 대충 알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한 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벽제관 전투 때도 [[왜군]] 3만과 교전을 벌여 명군이 처참히 깨지고 난 후 [[이여송]]은 정탐을 해서 한성 왜군 병력을 20만 정도로 예측했는데, [[류성룡]]은 "적군 병력이 매우 적은데 왜 진격 안 하나염?" 징징 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에 이여송은 "너네들은 사세를 알지도 못하면서 왜 시끄럽게 떠드냐"고 일갈할 정도. 확실히 [[이여송]]의 왜군 20만설은 오버이긴 하지만, 10만 이상이 운집했던 건 사실이고, 이 시기에 풍토병 때문에 명군 요동 기마대의 말 12,000필을 잃은 상태였던 데다, 고작 명군 5만명에 조선군 수천명으로 한성을 공격했다간 분명히 조명 연합군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이후 전란 내내 명군은 조선군이 제공하는 정보를 불신했다.] 그래서 [[왜군]]을 그저 왜구 정도로 생각했던 조승훈은 겨우 5천(혹은 [[기병]] 3천)의 군사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부장 사유를 포함해 절반이 넘는 명군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고 [[압록강]]을 넘어 본국으로 도주했다. [[명나라]]는 이에 식겁해 [[이여송]]에게 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게 했다. 이후 대패했다고 짤리진 않고 다시 [[조선]]에 왔으며, 지위는 조승훈은 명의 조선 원병에서 북군이 중심이 된 좌우중군 중 우군의 부대장 격으로, 총병인 장세작 밑에 있었다. [[송응창]] 밑에 [[이여송]], 그 밑에 [[양호(명나라)|양호]], 이여백, 장세작인 셈. 비슷한 급으로는 남군[* [[왜구]]나 [[버마]]와 격돌] 출신으로 역시 부총병을 거쳐 서로 총병으로 승진한 [[유정(명나라)|유정]]이 있다. 이후 조승훈은 다시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지만, 결국 한국인들에게 남은 이미지는 '''[[파병]] 와서 깨진 장수'''로 인식되는 정도. 요동 동령위(東令衛)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자신이 조선과 한 집안 사람이라는 립서비스를 쳤다. 조선 쪽 사관은 이 말에 요동이 옛 [[고구려|고(구)려]]의 땅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대체로 아버지의 병역이 아들에 이어지는 명나라 관습 때문에 아들 [[조대수]](祖大壽, 1579 ~ 1656)도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이 조대수는 [[오삼계]]의 외삼촌이며 나중에 [[홍승주]]의 명나라군이 참패할 때 같이 청나라에 항복, 청나라의 중원 정복을 도왔다. 청나라에서 좌도독, 영록대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조승훈은 [[오삼계]]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