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예 (문단 편집) ==== [[흑화]] ==== 그런데 여태껏 잘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느 시점부터 [[정줄놓|정신줄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지]], [[지름신]]이 들려 [[심시티]]에 [[하렘]]짓에 푹 빠져 [[사치]]를 일삼기 시작했다. 조예가 사망할 당시 나이가 겨우 34~36세로 당대 기준으로도 일찍 사망한지라 말년이라고 해서 흔히들 생각하는 노인도 아니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235년 3월 문덕곽황후를 장사지내는데, 이때 조예는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켜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후궁]]도 늘렸다. 당연히 이에 대해 간언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잔잠]], [[고당륭]], [[노육]], [[진군]], [[양부(삼국지)|양부]] 등이 상소문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어쩔 때는 한 달에 수천 개나 되는 상소가 오기도 했는데, 조예는 이를 일일이 다 읽으면서 늘 좋은 충고를 잘 들었다며 제대로 답장도 전했다. 하지만 앞에서는 이렇게 그 어떤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여 대답도 잘 해놓고 '''뒤에서는 싹 무시했다.'''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후궁을 많이 거느렸다고 해도 일국의 황제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궁궐 안에 있는 여자들을 총애하는 데 빠져 있어서 최고위 후궁부터 청소하는 궁녀까지 무릇 수천 명이나 되었다, 당연히 문제가 안될리가. 조예는 여자 가운데 문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 6명을 뽑아서 여자 상서로 삼았고 밖에서 오는 상주문을 살펴 상주문이 윗사람 마음에 안 들면 마땅히 처리하여 내려보내는 처당(處當)과 상주한 내용이 가하다는 그림으로 표시하는 화가(畵可)로 표시하게 했다. 즉 상소문은 여비서들에게 맡기고 놀아버렸다는 소리. 이에 [[고유(조위)|고유]]가 황제의 마음에 정말 드는 미녀들 최소한만 추리고 나머지는 내보내라고 했지만 조예는 대답이 훌륭하다고만 하고 듣지 않았다. 또 수렵(사냥)에 대한 법률이 엄격해 금지구역의 사슴을 죽이면 사형에 처했는데 사슴이 불어나 새순을 먹어치우니 곳곳에서 피해가 생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예를 들어 형양 인근 수백 리는 1년 내내 수확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조예가 들었다는 말은 없다. 양부의 경우엔 계속 간언하다가 황제가 예법을 어긴것도 지적하고 후궁을 줄이라고 간언하려다 자세한 후궁 숫자를 들으려고 궁정관리인 어부의 관리를 불렀다가 기밀이라고 하자 바로 곤장 100대를 치고 꾸짖으니 조예가 양부를 꺼렸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237년 태자사인 [[장무]]는 지금 군대를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부세로 감당이 안 되어서 힘들어 죽겠는데 궁에 들이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은 여자는 왜 가지려 하시느냐면서 지금 황후의 거처인 초방[* 椒房, 산초나무 열매의 가루를 바른 방이라는 뜻으로, 왕비가 거처하는 방이나 궁전 따위를 이르는 말.]의 모후(母後)들에게도 제멋대로 상을 내려주고 안밖으로 바꾸어가며 이끌어주니 그런 비용이 군비의 절반이나 된다고 깠으나 역시나 조예는 듣기만 했을 뿐 실천하지 않았다.[* 그외 장무는 황실의 물건을 관리하는 창고인 중상방(中尙方)에선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고 뒷 뜰에서 승로반을 세우니 이게 무슨 요순이 아니라 [[한무제]] 같은 짓이냐면서 깠다. 유엽이 조예를 처음 봤을 때 한무제를 떠올렸다는 걸 생각하면 유엽의 안목은 묘하게 들어맞았던 셈이다.] 그가 사치를 부렸다는 궁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자.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35년 3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조예는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총장관은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었는데 백성들은 이 노역을 하느라고 농업과 잠업(누에치기) 적기를 놓쳤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 조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군]]이 궁궐공사 등 토목 사업의 규모에 대해서 간했지만 경비만 조금 줄인 수준이었다. 위략에 따르면 조정에서 태자사인 장무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중에는 '장병(將士)의 부모와 처자들의 굶주린 자를 후하게 하사하고, 백성의 병환을 물어서 그 악함을 없애고, 곳간을 채우고, 갑옷과 병기를 보수하고, 공경함으로서 천하에 임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있다. 즉 장병의 부모, 처자들이 굶주릴 정도였다는 것. 같은해, 조예는 맹진항이 보이는 전망대를 지으려다가 [[신비(삼국지)|신비]]의 간언으로 그만둔 적도 있다. 부역이 심해지니 [[장제(조위 태위)|장제]]와 [[왕기(삼국지)|왕기]]가 부역을 그쳐달라고 상소했지만 조예는 모두 듣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예는 '''그 어떤 간언도 용납하는 대신 거의 따르지를 않았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 7월에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 버렸는데 자치통감과 위서 고당륭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조예: (숭양전이 불탄) 이것은 어떤 허물이오? 예법에는 어찌 기도하여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있소? >고당륭: 《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위가 절검하지 않고 아래가 절검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그들의 집을 태운다'고 했고, 또 '군왕이 누대를 높이면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힘써서 궁실을 장식하면서 백성들이 텅 비게 되고 고갈되어 있는 걸 알지 못한 것이니 하늘이 그것에 대응하여 가뭄(旱)를 주고, 우뚝 솟은 궁전에 화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하늘이 감계를 내리는 것은 폐하를 꾸짖고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인도(人道)를 더하고 숭상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만 합니다. 즉, 3~4월에는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되느라고 농사시기를 놓쳤고 장병들의 처자들에게 줄 식량이 없었으며 7월 이후에는 백성들이 텅 비고 고갈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들어 가뭄이 들게 했다는 것으로 당시 가뭄으로 인한 재해[* [[자치통감]]의 현대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資治通鑑全譯)에서는 대놓고 한재(旱災) 즉,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이라고 쓰고 있다.]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영서의 진서에 따르면 이해 정월에는 수도에 홍역까지 돌았다고 한다. 전염병에 농사 시기를 놓친 데다가 가뭄의 재앙까지 들었으니 기근이 들고 흉년이 되는 건 당연지사, 결국 장안에 있던 사마의가 흉년이 들자 양곡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내게 된다. 그래도 조예의 궁궐벽은 멈추지 않았다. 조예는 숭화전(崇華殿)을 재건하게 하고, 구룡전(九龍殿)으로 명칭을 바꾸게 했다. 물을 끌어다가 옥으로 만든 우물과 비단으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고 두꺼비상을 만들어 물을 받아들이고 옥으로 만든 신룡으로 물을 토해내게 했다. [[마균]]을 시켜다가 지남거와 사남거를 만들게 하고 1백 가지 물로 돌아가는 장난감을 만들도록 했다. 고당륭이 간했지만 또 듣지 않았다. [[왕숙]]은 지금 궁궐 짓느라 노역하는 자가 3~4만 명인데 힘센 사람 1만 명으로 줄이고 교대 근무를 하며 나머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돌려보내자고 간언했다. 또한 관리를 처벌해 사형에 처할 때는 갑자기 처형하지 말고 형리를 보내 알리자고도 하였다. 물론 이것도 조예가 들었긴 했지만 실천했다는 얘기는 없다. 통화 체계의 혼란은 없었지만, 눈에 띌 정도의 재정적 붕괴나 농사 시기를 놓치게 만드는 부역, 조예의 도가 지나친 사치에 들어가는 세금 등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조조]] 이래로 3대에 걸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건 분명하다. [[조조]]는 전쟁 문제로 인한 징집과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렸고, [[조비]]는 사냥 등으로 백성들을 고생시켰다고 나온다. 조예 후반기 치세의 문제는 황후가 죽고 장마가 들어 기주에선 사람과 재물이 떠내려가는 물난리가 나자 보다 못한 고당륭이 올린 상소에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전략)...지금 천하는 빈곤하고 황폐하며, 백성들은 1석도 비축한 것이 없고, 나라에는 1년을 버틸 만큼 비축한 것이 없건만, 밖으로는 강한 적이 있어 폐하의 군대가 국경에서 싸우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토목 공사가 한창이라 주와 군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란하오니, 이러다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신하와 백성들이 명을 받들어 맞서 싸우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또한 지금 장수와 병사들의 봉록이 눈에 띄게 깎이어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후략) 이때 일화 하나를 들자면 [[도교]]에 심취해 이슬을 받아 먹겠다고 구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신선 모양의 동상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다가 이게 자빠지는 바람에 부역하던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한다. 결국 부숴가며 옮긴 뒤에 동인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이 들고 있던 승로반이라는 쟁반에 맺히는 이슬에 옥가루를 태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슬 받아 먹어봤자 남는 건 체내 [[중금속]]뿐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조예를 묘사할 때 [[양부]]를 포함한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를 말리려고 하다가 파면당하거나 목이 달아나는 묘사가 나오는데, 정사에서 이 사람들은 딱히 처벌을 당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처벌하자고 했으나 조예가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간언한 고위 대신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이어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성질이 대단히 급하여 궁궐 짓는 기한이 늦어지면 곧바로 담당자를 불렀는데 담당자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또 위에서 썼던 것처럼 조예는 사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가혹한 법령을 느슨하게 하고 사형에 처하는 죄를 줄였다는 본전의 기록과는 전혀 대조되는 얘기도 있다. 명제기 주석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적발하고 들어내는 걸 좋아해, 경미한 일로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는데, [[진랑]]이 이에 대해서 아무런 간언을 하지 않아 조예가 총애했다고 한다. 이게 진짜라면 그 할아버지 조조나 아버지 조비와 마찬가지로 조예에게도 잔인한 면이 있었던 것. 또 조조나 조비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남의 아내 강탈해다가 딴 사람 주기도 시정되지 않았다. 235년,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으며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라는 화를 만났으며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가 얼굴을 덮었다고 했다.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명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가 새어머니인 [[곽여왕]]을 죽인다. 조예는 [[곽여왕]]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생모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조비]])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분노한 조예는 [[곽여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엄청난 양의 쌀겨를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 방식은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으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 236년에는 고당륭이 궁궐을 자꾸 짓고 사치하는 조예에게 '병사들과 백성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군국(軍國)에 있는 비용과 후궁들 거느리는 비용이 비슷하다고 했다면서 백성들은 명령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두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으며 궁실을 지나치게 성대하게 지었는데 (작년같이) 하늘의 노여움을 거듭 나타내게 하지 말라'고 했다. 조예는 옳은 말을 하는 고당륭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노육]]이 나서서 조예의 화를 풀었다. 하도 많이 간언을 하다 보니 조예가 고당륭을 두려워했을 정도다. 고당륭은 죽을 때까지 황제에 대한 충언을 멈추지 않았고 '천하는 천하 사람들의 천하지 폐하만의 천하가 아닙니다'는 마지막 충언을 올렸지만 조예는 역시 조서를 내려 그를 위로할 뿐 듣지 않았다. 심지어 죽기 직전인 자치통감 237년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도 슬슬 그만두려 했는지 방림원이라는 정원 모퉁이에 산을 만들고 공경(公卿)들과 많은 관료들에게 모두 흙을 짊어지게 하고, 소나무, 대나무, 잡목, 예쁜 꽃을 심고 산새와 여러 짐승을 잡아 가두어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즉 공경이라는 높은 관료들을 부역에 써먹은 격이니 이때쯤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238년, 사마의를 [[공손연]] 토벌에 보낸 조예는 자신의 황후인 [[명도황후]]를 자결시키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명원황후]]를 두 번째 황후로 삼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