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완구 (문단 편집) === 초년기 === 조완구는 1881년 음력 3월 20일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풍양 조씨]]로, 부친 조동필(1845~1894)은 이조참판이었으며, 조부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조봉하(1817~1891), 증조부는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로 병조, 이조, 에조, 형조, 호조 판서와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병현(1791~1849)이다. 고조부 조득영은 [[조만영]]·[[조인영]] 형제의 8촌 형이었다. 조완구는 3남 중 2남으로 태어났지만, 맏형 조영구가 1894년 역병에 걸려 아버지와 함께 사망하면서, 그는 13살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 사촌형 조정구(1860~1926)는 [[흥선대원군]]의 사위로, 조남익, 조남복, 조남진 등 4형제와 두 딸을 두었다. 그 중 첫째 딸 조계진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에게 시집을 갔다. 사실 이회영 가문은 소론, 조정구의 가문은 노론이었으니 혼인이 성사되기 어려웠지만, 조완구가 둘을 중매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당색을 따져 무엇하우.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나라 되찾는 데 힘을 합칩시다."라고 하면서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조정구는 고종의 매부로 궁중 출입이 비교적 용이했고, 그의 아들들은 주전원, 시종원, 비서원 등에 근무하며 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2009년 4월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에서 공개된 광무황제의 어새가 찍힌 영문문서에 따르면, 퇴위한 한국의 황제가 1909년 1월 1일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조카 조남복을 잘 돌봐달라고 헐버트 박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 뒤 조정구, [[이상설]], 이회영이 고종의 망명을 꾀했지만 고종이 갑자기 죽어 실패했다는 설이 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완구는 15살 때인 1895년 아내 홍정식(1881~1945)과 결혼했다. 홍정식은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금산군수 [[홍범식]]의 여동생으로, 그녀의 집안 풍산 홍씨는 노론 명문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누구에게 배웠으며 동문수학한 이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 후 1899년 내무부 참봉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효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고, 1900년 법관양성소[* 한성법학전수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학교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법관양성소가 1911년 경성전수학교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생긴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에 입학한 뒤 1902년에 졸업하여 내부주사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